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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쇄신’ 외치던 정치인서 ‘혁신 도지사’로 변신

 

남경필, 그가 걸어온 길


 

수원서 남부럽지 않던 어린시절
美 유학 중 국회의원이던 父 별세
33세 보궐선거 출마… 국회 입성


정병국·원희룡과 쇄신 이끌며
당내 비주류 소장개혁파 선봉

 



‘혁신 도지사’를 기치로 내걸었던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자. 민선6기 경기도호를 이끌 남 당선자는 줄곧 네거티브 없는 정책선거와 함께 새로운 리더십으로 경기도와 대한민국을 바꿀 것을 강조했다. 인생의 절반을 정치인으로,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혁신과 개혁은 어찌보면 삶 그자체 일지 모른다.

개혁과 쇄신을 외쳐온 남 당선자. 이제는 정치인에서 정치지도자로 변신한 그의 살아온 길을 되짚어 본다.

 



■ 유복한 가정의 개구쟁이 아들

남경필 당선자는 1965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장남이다. 집안의 가업인 경남여객 운영 덕(?)에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저 마을 앞 시냇가에서 친구들과 미역감고 가재잡기를 좋아하던 개구쟁이였다. 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이다.

도지사 후보로 나서 ‘따복마을(따뜻하고 복된 공동체)’을 대표 공약으로 내건 것은 이때의 추억의 한 조각 일지 모른다.

연세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던 시절, 처음으로 ‘부채’란 것에 대해 인식했다. 민중 가수인 안치환과의 만남 이후다.

남 당선자는 “사회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던 저와 달리, 안치환씨는 생각이 깊었다. 그는 속속들이 민중의 아픔을 느끼는 데 비해 유복하게만 자란 저는 그렇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을 졸업,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남 당선자는 1990년부터 3년간 도내 일간지 기자로 활동하다 1996년 미 예일대 유학길에 올라 경영학을,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예일대 시절 한인 학생회장도 맡았다. 정치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 시기다.

그는 “예일대 시절 한인 학생회장을 맡아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경험은 두고두고 내 청춘의 자산이 되고 있다”고 회고했다.

 



■ 갑작스런 정계 입문

유학중이던 1998년 3월, 남 당선자의 부친인 남평우 15대 국회의원이 임기 도중 갑작스레 별세했다. 이후 남 당선자는 지역 주민의 추대로 4개월여 만에 선친의 지역구인 수원 팔달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박왕식 후보를 극적으로 제치고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당시 남 당선자의 나이는 33세에 불과했다.

열세지역으로 평가 받던 팔달구 승리로 당시 한나라당은 보궐선거 7개 지역 가운데 4곳을 석권, 남 당선자가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남 당선자는 당시 “오늘의 정치에 실망한 많은 지역 구민들이 투표에 불참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새로운 변화와 깨끗한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뜻을 받들어 희망찬 21세기를 열어가는 데 앞장서는 새 정치인이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치 입문과 함께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할 개혁과 쇄신의 길을 천명한 셈이다.

이후 남 당선자는 19대 국회까지 5선에 내리 성공, 경기남부지역 특히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 새로운 시대정신에 눈 뜨다

15대에 이어 16대 재선에 성공한 남 당선자는 정병국, 원희룡, 오세훈, 김부겸, 김영춘 의원 등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쇄신과 개혁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경기지사 후보경선에서 맞붙은 정병국 의원, 제주지사 후보로 확정된 원희룡 의원과 함께 원조소장파인 ‘남·원·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명 잘나가는 주류에 포함되기도 했다.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2년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젊고 진보적인 방향을 지향하겠다는 당의 의지와 남 당선자의 이미지가 부합돼서다. 당시 이회창 총재의 비서실 부실장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시면서 남 당선자도 대변인직을 사퇴, 정치의 중앙무대에서 멀어졌다. 남 당선자가 민심의 무게를 새삼 깨달은 시기다.

이후 남 당선자는 비주류 소장개혁파의 선봉으로 활동했다. 17대에 들어서는 쇄신파 목소리만 높일 게 아니라 공부와 토론을 해야 한다며 당내 소장파 의원 모임인 ‘미래연대’와 함께 ‘새정치수요모임’의 대표를 맡으면서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04년 당시 박근혜 대표와 의기투합, 쇄신파 주도로 천막당사를 이끌며 당을 위기로부터 구하기도 했다.



■ 남경필의 정치는…

남 당선자는 가슴에 한도 없고, 갚아야 하거나 청산해야할 과거의 악연도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더 나은 세상, 코리안 스탠다드가 세계의 스탠다드가 돼 선진국조차 부러워하는 복지와 정치, 경제가 잘 이뤄지는 사회를 만드는 게 꿈이다.

이 같은 남 당선자의 목표는 그동안의 정치생활에 묻어난다.

외통위원장 시절 민주적 절차와 소통으로 한미FTA를 통과 시켰다. 한미FTA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남 당선자는 1천500분이 넘는 토론 끝에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 폭력사태를 막아냈다. 또 국회 다수당의 일방적인 법안이나 안건 처리를 막기 위해 2012년 제정된 국회 선진화법 제정의 주역이기도 하다.

2008년 3월 포항으로 내려가 이상득 의원의 차기 총선 불출마를 건의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 당시 총리실 사찰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 당선자는 국회의원 16년간 소장개혁파로, 쇄신파로 당내 권력과 최고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개혁의 길을 걸었다.



■ 주요 약력

▶1983년 경복고 졸업 1988년 ▶연세대 사회사업학과 졸업 ▶1993년 경인일보 기자 ▶1996년 미 예일대 경영대학원 졸업 ▶2001년 한나라당 대변인 ▶2004년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 ▶2006년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재선) ▶2010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2011년 한나라당 최고위원 ▶2012년 5선 국회의원(15, 16, 17, 18, 19대)

▶현 대한장애인아이스하키 협회 회장 ▶현 한·중 국제e스포츠대회(IEF)조직위원회 위원장 ▶현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실천모임 대표 ▶현 한국인터넷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 (KIDEA) 협회장 ▶현 국회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 대표 ▶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안경환기자 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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