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모든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때는 위기에 부딪친 개인 혹은 집단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위기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는 (공동의) 의지를 결집하여,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는 위기일 뿐이고, 위기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대결하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을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마침내 파괴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의식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현실 속에 살면서, 또 똑같은 사건을 당하면서도 위기의식의 강도 차이는 물론, 그에 대한 대응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급진과 온건 등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위기(crisis)를 나타내는 헬라어(krisis)의 어원은 ‘결단하다’, ‘채로 걸러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 ‘위기’(危機)는 ‘틀이 위태한 상황’을 의미하고는 있으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헬라어 ‘위기’는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보다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군더더기를 채로 걸러내어 과감하게 무거운 몸을 가볍게 하고,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단’이라는 말에도 ‘잘라내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결국 ‘위기’는 불필요한 것을 과감하게 채로 걸러내고, 무거운 것을 잘라낼 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때’입니다. 언제가 가장 적합한 ‘때’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늦은 대응은 하나마나인 경우가 있습니다. 버스 지나간 후에 손을 든 격이지요. 물론 모든 빠른 대응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때’를 판단하는 것이 채로 걸러내고 무거운 것을 잘라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학마다 위기라고 합니다. 한국의 메이저 대학 몇 개를 제외하고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대학의 위기는 더 심각합니다. 위기의 근원에는 학령인구의 감소라는 대학이나 정부에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객관적 현실이 있습니다. 정부는 대학의 자율적인 구조개혁보다는 재정지원을 매개로 또는 대학평가를 근거로 정원감축 및 퇴출이라는 ‘위로부터의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취약한 재정기반을 가지고 있고, 또 등록금 의존율이 높은 사학들은 이제 곧 더 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비인기학과들의 통·폐합, 정원감축 등 편제개편은 이미 시작됐고,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논의도 시작됐습니다. 한정된 재원을 중심으로 이른바 분배갈등이 대학 사회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미 확고한 대학의 서열화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고, 시간이 가면서 문을 닫는 대학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대학의 위기입니다. 학령인구의 감소, 취약한 재정, 그에 따르는 교육의 질 저하 등은 물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위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위기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변하지 않는 대학,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대학은 결국 소멸될 것이고, 당연히 소멸돼야 합니다. 대학 몇 십 개 없어진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구체적인 위기에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해야 할 때입니다. 도대체 교육은 왜 해야 하는가? 대학은 왜 있어야 하는가? 대학은 어떤 인물을 키워내야 하는가? 교수란 누구인가? 지난 4월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은 국가와 우리 사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에 급급한 것에 있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하나의 방식, 희생자들에 대한 살아있는 이들이 갖춰야 할 예는 우리 사회를 그 근본과 지향점에서부터 문제 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