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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가을 거리에서

 

커피 한잔 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바람의 속도로 제 몸을 벗는 은행나무의 샛노란 잎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지난 겨울 가지치기로 몽당 나무가 되었을 땐 나무에 미안한 생각이었는데 여름내 제법 가지도 늘였고 은행잎도 실하게 매달았다. 슬그머니 은행나무를 안아본다. 한 아름이 되고도 남는다. 십여 년 넘게 나를 지켜온 나무이기도 하다. 우울할 때나 무료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은행나무에 심통을 부리곤 했다.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등을 기대기도 하고 타박하면서 투덜대곤 했다.

현이란 친구였다. 은행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친구다. 순수하고 착했다. 스산한 가을에 마시는 유자차처럼 싱그럽고 새콤한 향기를 지닌 그는 은행잎이 떨어지면 책갈피마다 은행잎을 끼웠다.

대학진학에 실패해서 두 번씩이나 재수를 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그 친구와 보낸 가을이 오늘은 한편의 영상처럼 스친다.

긴 만남은 아니었지만, 서로를 보살피면서 서로에게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었고 소중한 기억을 남겼다.

자그마한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조금은 마른 편이었다.

검은색 가죽 재킷을 늘 입었고 가죽장갑을 끼고 다녔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거나 찻집의 한쪽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잘거렸다. 매일 보면서도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았던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하기야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배꼽을 움켜쥐고 석양이 슬프다고 눈시울을 적실 정도로 감성이 충만한 때였다. 노랗게 쏟아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유난히 가을을 좋아했던 너, 낙엽 수북이 쌓인 우암산 중턱에 난 길을 함께 걸었고 가랑잎 위에 누워 낭만을 이야기하고 젊음을 노래하던 그 시절, 우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많이 고뇌하고 많이 방황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점치려 했고 세상의 모든 고독과 번뇌를 짊어진 듯 괴로워하고 아파하면서 사랑하는 법과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오래된 연인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고 손끝에 머무는 따스한 온기만으로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젊어 한때가 네가 있어 행복했다. 은행잎이 떨어질 때면 바람처럼 들렀다.

가는 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길을 걷는다는 시 한 수 남긴 채 훌쩍 사라진 너,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문득문득 일상에 끼어들긴 했지만 이내 잊고 살았다. 빛바랜 사진처럼 한구석에 밀어 넣은 채 내버려두고 살았다.

어느 날 사진첩을 열어본 순간 그 속에서 향기가 품어져 나오고 너의 숨결이 살아있고 외면했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곰삭은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보고 있지 않아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고이는 사람, 서로 안부는 없었지만, 어디에선가 제 몫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다.

바람을 따라 나선 은행잎에 안부를 부탁한다.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 이 가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만날 수는 없지만 너를 기억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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