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 군사들이 익혔던 무예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칼이었다. 조선후기의 경우는 칼집에 고리를 만들어 허리에 매는 칼인 환도(環刀)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긴 창을 사용하던 장창수나 화포를 다루던 포수들도 모두 허리에는 환도를 하나씩 패용해서 혹시 모를 근접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사람의 키가 다르고 뽑아낼 힘이 다르기에 저마다 환도의 크기를 조절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장기에 따라 칼의 규격을 일정정도 조절해서 전투에 가장 효과적인 움직임을 얻으려 했다.
심지어 병서를 보면 각각의 군사들의 신체조건에 따라 주특기에 활용하는 무기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키가 작은 사람들은 방패를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하여 만약 자리 앉으면 상대가 공격할 틈이 전혀 없도록 하였으며, 키가 큰 사람들은 장창을 잡게 하여 조금이라도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가장 용감하고 뛰어난 사람은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의 전술행동에 직결되는 징이나 북과 같은 신호용 악기를 훈련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장기를 적극적으로 살려 무예를 익히거나 군사훈련을 해야만 최고의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남이 사용하는 무기가 멋져 보여 억지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무기를 다루려고 애쓰다가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감당할 수 있는 무게나 길이를 넘어서면 신체적 무리로 인해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또한 자신의 담력이 크지 않은데, 억지로 군사신호용 악기를 다루려다 자신이 속한 부대원 전체가 곤경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생기기도 했다. 이처럼 제 몸에 맞지 않은 무기는 오히려 큰 화를 부르는 일이기도 했다. 역시 제 몸에 맞지 않은 옷 또한 그런 이치다.
조선후기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인 〈양반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후기 강원도 정선에 학덕이 높은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먹었는데 천 석이나 빚을 지게 되었다. 각 고을을 탐방하며 현지답사를 하던 관찰사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해당 마을 현령에게 그 양반을 투옥하라 명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그 양반은 빚 갚을 능력이 안 되어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그 고을의 현령이 꾀를 내어 양반 신분을 팔아서 그 빚을 갚아보려 했다. 다행이 비록 신분은 비천하나 돈을 엄청나게 모은 사람이 있어 그 매매증을 돈을 주고 사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양반증(?)을 돈 주고 산 그는 곧장 테가 넓은 갓과 긴 도포자락을 걸쳐 입고 ‘나도 이제 양반입네’ 하며 거들먹거리며 관청에 들렀다. 그때 양반이 해야할수많은 일들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알려주자 그가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장차 나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입고 있던 양반의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을 갔다고 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 내용은 조선 후기 신분 질서 변동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양반의 허위와 무능, 권력 남용을 통렬하게 풍자 비판함에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돈은 벌만큼 벌었지만, 신분이 비천한 이가 억지로 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으려다 오히려 큰 곤경에 빠진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나마 양반증을 돈으로 산 사람은 옷이라도 벗어 던지고 도망을 갈 수 있는 양심과 염치가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그가 자기도 이제부터 ‘양반입네’ 하며 그동안 쌓였던 화를 분풀이라도 하듯 쏟아 냈다면 그 화는 고스란히 주변사람들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제 몸에 맞지 않는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화를 끼칠 수 있다. 역시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은 옷이나 자리 역시 남에게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승리를 이끌어 노예 해방을 달성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의 성품을 알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아무리 작은 권력이라도 그것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지켜야할 것을 품어 안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