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늦가을 바람이 산등성을 넘어가자 상수리나무가 즐비한 산비탈엔 상수리나무 낙엽들이 지천으로 많다.
윤이 반질반질한 낙엽들. 싱그러운 낙엽들이 쌓여있는 곳을 지나면 발바닥이 푹신하며 경쾌하다. 그 싱싱한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경쾌한 리듬 때문에 내 머릿속까지 상쾌하다.
나뭇가지들과 지금 막 이별을 고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한없이 하강하는 숭고한 낙엽들. 머잖아 그 낙엽들은 눈비와 바람을 맞으며 얼었다가 녹았다가 반복하여 마지막 겨울을 통과한 다음엔 나무들의 거름인 부토가 되어 봄날 재생할 것이다.
낙엽을 밟으면 지난 시간들이 바스락거리며 다가온다.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서 작열하던 태양이 떠오른다. 불이 타오르는 듯한 하늘의 붉은 열기를 상수리나무의 잎들이 막아주었다. 그 작열하는 불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마치 어린 아기의 머리를 감싸 안은 어머니처럼... 별안간 한바탕 소나기가 뜬금없이 향연을 베푸는 동안 상수리나무 아래에 서면 사나운 빗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나긋한 비서처럼 혹은 호위무사처럼 아니 경호원처럼 빗줄기의 난폭한 세례를 막아준다. 그러나 그 상수리나무 잎새들이 지금은 이렇게 푸근하게 쓰러져 누워있다.
반질반질한 상수리나무 낙엽들이 생의 종언(終焉)을 알리는 아다지오의 리듬이 흐를 때, 나는 한없는 장송곡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장엄하다, 그 소리는. 이 소리를 들으려면 인적이 드문 다람쥐, 청설모들이 노는 한적한 곳에 가야한다. 게다가 산 중턱에 있다. 그곳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우리사회 곳곳에서도 장송곡이 애달프게 울린다. 서럽다. 그러나 넘어서야 한다.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없겠는가? 나의 생명이 있다면 희망이 있는 법이다. 지금은 상수리나무 낙엽처럼 그렇게 윤이 나는 나무의 시체일지언정 그 낙엽은 부토가 되어 흙을 비옥하게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희생이 법적으로 구제를 받지 못한다 해도 또 다른 그 누구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우리 인생이 상수리나무 낙엽처럼 덧없지만 그러나 빛나는 낙엽으로 소망의 씨를 뿌려줄 것이다.
약자의 정의로움이 강자의 자비(慈悲)보다 낫다. 강자의 자비의 이면엔 만용과 교만이 교묘하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비록 패배한 약자일지언정 정의로움은 영원히 썩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지는 것이 진 것은 아니다. 진실로 진 것은 포기하며 주저앉는 것이다. 씨앗들이 한결 둥글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가? 무지막지한 겨울로부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그것은 둥글고 보잘 것 없어야 한다. 그래야 남들이 탐내지 않을 것이요 둥글어야 이 모난 세상과 대결하여 자신을 보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부토로 돌아가고 씨앗은 생명을 잉태하는 저 상수리나무처럼 한때 우리도 화려했던 여름이 있었다. 그래서 지나는 행인들의 그늘막이나 우비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차피 세상에 산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수리나무처럼 사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경기예총 2012년 빛낸 예술인상 수상 ▲한광여중 국어교수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 ▲시집 ‘카프카의 슬픔’(시문학사·199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