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22대 왕 정조 임금이 쓴 두종류의 편지첩이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정조어필(正祖御筆)이라는 것으로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인데 모두 2첩으로 그 첩에는 36건의 정조 친필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첩이다. 정조신한(正祖宸翰)이라 부르는 첩과 두루마리 30건이다. 이 두 종류의 편지들은 모두 다른 날짜의 편지들을 수신자쪽에서 받은 후 모아 두었다가 첩으로 만든 것이다.
정조가 4년동안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치현안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환후에 대한 걱정과 문안 등 집안의 경사에 대해 안부를 묻는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편지는 왕뿐만이 아니라 세종 당시부터 궁중과 민간을 불문하고 정치와 생활상에 많이 오고 갔다. 가장 오래됐다는 정철(鄭澈)과 그의 어머니 안씨(安氏) 사이에 내왕한 편지를 비롯, 윤선도(尹善道)·송시열(宋時烈)·김정희(金正喜) 등을 비롯하여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편이라는 한글편지가 현존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편지는 왕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소식을 서로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보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글도 순한문 또는 이두문을 섞어서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 또는 한자를 섞어서 쓴 언간(諺簡) 등 다양했다.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편지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사적인 것으로 분류 ‘서간(書簡)’이라 불렀다. 명칭 또한 다양했다. 서간이외에 서찰(書札)·서자(書字)·서한(書翰)·서함(書函)·척독(尺牘)·편저(片楮)·소식(消息)·수찰(手札)·신서(信書)·안신(雁信) 등 한자어로 된 이름이 무수히 많다. 우리 고유말로는 우무·글월·고목(告目)·기별(寄別)·편지(片紙, 便紙) 등도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문체 구성은 서간문이 생길 만큼 비슷했다. 발신인(發信人)·수신인(受信人)·용건(用件) 등 세 가지가 필히 고려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정조가 어린아이였던 원손 시절쓴 한글 편지가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돼 화제다. 제대로된 서간문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해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어린 정조의 편지를 보며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