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가을이다. 바람이 나무의 옷을 벗긴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한 해 동안 걸쳤던 옷을 훌훌 벗어내는 나무들, 저것이 한 해의 빛깔들이다. 바람의 색이고 태양의 색이고 비의 색이다. 아침마다 베란다로 넘겨다보던 나무는 수시로 옷을 갈아입곤 했다.
아직은 추위가 남아있던 이른 봄날 겨우내 가뒀던 잎들을 분만하기 위해 나무는 입덧을 시작했고 한 뼘쯤 커진 가지 끝에서 망울을 피워내며 칙칙하던 제 몸을 환하게 밝히더니 봄비 촉촉이 내린 뒤 말간 연둣빛 잎을 꺼냈다.
나무의 변신은 무죄다. 우울하다고, 기분 좋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온갖 구실을 들이대며 옷을 사달라고 조르는 딸애처럼 옷의 색깔이며 크기를 조절해가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가끔은 까치가 날아와 쉬었다가기도 하고 잎과 잎 사이로 햇살이 내려와 반짝이기도 했지만, 단골손님은 바람이었다. 바람결에 잎들은 수런거렸고 바람이 화가 나면 몹시 가지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이내 나무와 바람은 한통속인 채로 계절을 모아들였다.
그 숲이 사라졌다. 퇴근하여 보니 나무가 모두 없어졌다. 얼마 전부터 낯선 사람이 드나들고 측량을 하는가 싶더니 아름드리나무며 소나무 과수나무까지 몽땅 잘리고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짧게는 몇 년 생부터 수십 년 된 나무가 톱질 몇 번에 나뒹굴고 단 하루 만에 숲 전체가 없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소문을 해보니 대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소문이 무성하기는 했지만, 막상 벌판이 돼버린 모습을 보니 속상하고 참담했다.
눈만 뜨면 습관처럼 내다보던 푸른 숲들, 사철 다른 모습으로 나를 행복에 젖게 하던 숲이었다. 그 숲이 좋아 이십여 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마지막 버스가 일찍 끊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다소 불편하지만, 별장 같은 곳이다.
안개가 짙게 깔리면 비밀의 성처럼 고요해지는 곳. 봄이면 배꽃이 온 밤을 하얗게 밝히고 잠자리에서도 별과 달을 보는 곳이다. 그 숲 대신 시멘트 숲이 놓일 것을 생각하면 벌써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이십여 만 평의 아파트가 들어서면 완전 회색 숲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값이 상승하고 이런저런 문화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의 가치나 투자의 목적보다는 주거환경의 안락함과 편안함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까치가 아침을 깨우고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보면서 바람의 방향을 읽어내고 나무를 흔들다 지친 바람이 베란다 유리문에 와서 칭얼거리면 문을 열어 바람을 맞이하던 풍경도 이젠 과거형이 되고 말았다.
뚝딱 하면 신도시가 생기는 개발의 물결 속에서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을 잘 살았으면 고맙게 여겨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없어진 숲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또한, 그 안에서 서식하다 거처를 잃은 것들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염려도 앞선다.
나무와 바람이 하나 되어 계절을 불러들이고 나를 사색하게 하던 숲, 회색 숲이 들어서기 전에 다른 거처를 꿈꾸어야 할지 고민에 빠져든다.
한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