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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 칼럼]인생동선과 추념

 

보름 전, 91세 부친께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경색으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병실에 입원하셨다. 온 가족이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모두 거주하지만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하는 불효를 종종 전화로 노부모의 안부를 탐색하는 것으로 대신했던 터라 자식들은 적잖이 놀라 한 밤에 응급실로 달려갔다. 자식들의 경제적 형편이 모두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모든 형제들의 속내는 부친의 병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병원비와 이후 형제들이 노부모께 각기 부담해야 할 의무가 초 관심사였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일생 교직에 계시다가 교장으로 은퇴하신 직후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연금이 없는 탓에 자식들이 모아서 드리는 월급으로 지금까지 살고 계신 형편이니 자식들은 특히 부친에 대한 애증 같은 원망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고생을 하면서 컸든 모두 불효자식들인 것이다.

퇴직 당시 일시불로 받아 노름빚을 청산하셨으니 재직 중에도 가족의 고생은 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연금을 수령하고 계신다면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태도와 노부모의 형편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부친은 좋은 직업을 갖고 일생 당신만을 위해 사셨던 분이신데 이제는 병상의 노인에게서 젊은 날의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옆에 간병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할 늙은 아내만 찾고 계신다.

이런 남편을 평생 원수처럼 여기며 사셨던 노모는 온갖 정 때문인지 부친께 냉랭한 자식들을 섭섭해 하신다. 퇴원하시면 요양병원으로 모실 것인지, 그러면 노모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식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염려하며 머리를 맞대지만 형제들 중 그 누구도 선뜻 방책을 제안하지 않는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이 세상에 이런 집이 어디 한 두 집이겠는가, 오히려 자식들이 버젓이 있는 집은 불효가 문제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었고 어떤 위대한 일을 했느냐 이전에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인생동선’이 있으며 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부친만 하시더라도 1920년 대 일제 강점 초기에 충남 서산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상계동 모 병원 병상에 누워계시기까지 90년동안 일어난 굵직한 사건만 보더라도 대동아전쟁, 일제 강점기에 학창생활, 한국동란, 4.19 학생 민주화, 5.16 군사 쿠데타, 유신, 광주민주항쟁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남으신 분이다. 이 세대들은 생명의 위협과 굶주림, 억압, 전쟁 등 숱한 곡절을 겪으시며 돌절구와 맷돌이 있던 구석기시대부터 최첨단 디지털 시대까지 사신 분들이고 그 자식들은 산업화의 역군세대로서 집 한 칸 마련하고 자식교육을 위해 헌신한 세대이며, 또 그 자식세대는 배고픔의 참혹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식 번성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 최신 세대이다.

손주들은 조부의 지나온 고통의 세월과 인생여정에 무심하며 조부에 대한 부모의 갈등도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조차 공유할 수 없는 자식세대와 더불어 3대가 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손주들도 나름 짧지만 ‘인생동선’이 있으며 앞으로 긴 세월 움직여야 할 동선을 계획하고 있으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한 참 더 걸어야만 한다. 후에 자식들이 성장해 늙은 부모의 동선을 기억하며 추념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연결되어 인생동선을 이루며 목적한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선은 편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이 동선 안에는 추념할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생동선’은 고생이 쌓여야만 의미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농경문화에서 사셨던 옛 선조들은 태어난 곳과 죽는 곳이 같거나 수 십 년이 지나도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태어난 곳과 죽는 곳의 장소성도 다르고 그 거리도 측량할 수 없다. 그 삶의 동선을 연결해 보면 아무리 불효자식일지라도 부모에 대한 추념거리는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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