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인류가 불을 다루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도구의 발명과 함께 원시 인류가 몸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면서 탄생시킨 ‘무예(武藝)’는 전투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바로 자연과의 거친 투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술 속에 무예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무예는 때로는 아이들의 재미있는 놀이로, 때로는 어른들의 피 튀기는 경기로도 변화하였는데, 조선시대 최고의 놀이이자 스포츠 경기였던 봉희(棒戱)를 통해 그 변화상을 살펴보자.
먼저 격구는 말을 타고 장시라는 긴 채를 이용하여 공을 구문(골대)에 넣는 군사무예였다. 사극에서도 종종 등장하면서 전통시대 군사 스포츠로도 잘 알려진 격구는 기병들이 익혀야 했던 최고의 기마술 훈련이자 온 백성이 관람 가능한 축제형 경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격구를 하려면 반드시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대 어린이들은 ‘말(馬) 없이’ 땅 위에서 공을 치는 놀이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막대기를 가지고 논다고 해서 ‘봉희(棒戱)’다.
봉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요즘 대중적으로 쉼 없는 인기를 얻고 있는 골프가 연상되기도 한다. 먼저 그 봉희에서 사용하는 도구인 ‘봉(棒)’은 두터운 대나무를 쪼개 이어붙여 탄성을 극대화시켰다. 골프채도 처음에는 나무를 이용하여 허리부분인 사프트(Shaft)를 만들었으니 그 재질도 비슷하기도 하다. 거기에 봉희에서 공을 때리는 부분은 숟가락 모양으로 오목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물소가죽을 씌워 타격감을 높였다. 심지어 끝에 씌운 물소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구치고, 반대로 두터우면 공이 낮게 깔리게 나간다고 되어있다. 재미있게도 골프에서처럼 헤드가 몇 번 우드(Wood)냐, 몇 번 아이언(Iron)을 쓸 것이냐 하는 클럽 교체 고민하는 것을 조선시대 아이들이 먼저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골프처럼 공을 넣는 구멍인 홀(Hall)도 봉희가 먼저 파서 공을 쳤다. 봉희에서는 음식을 담는 작은 그릇인 주발 모양으로 땅을 파고 ‘와아(窩兒)’라고 불렀다. 거기에 수십개의 홀을 이동하며 다니듯, 봉희에서는 집 마당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놓고 골목길까지 연결해서 공을 치고 돌아다녔다. 프로 골프 선수들도 모래 웅덩이에 골프 공이 빠지면 힘들어 하면서 퍼올리는 벙커샷(Bunker Shot)도 ‘봉희 때리기’가 먼저다. 여기에 봉희에서 사용하는 공 크기도 달걀만 하다고 하고, 한 번에 때려서 들어가냐, 아니면 두 번 세 번 때려서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점수를 다르게 줬다. 골프에서 기준타수인 파(Par)를 넘어서 보기(Boggie)냐, 더블 보기(Double Boggie)에 따라 점수가 깎이는 방식도 봉희가 먼저였다. 봉희에서 단 번에 공을 집어 넣으면 점수를 계산하는 가지(算)를 2개 얻고, 두 번 세 번 쳐서 들어가면 2개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 단번에 공이 들어가면 상관이 없지만, 두 번 친 공이 다른 사람의 공과 부딪치게 되면 그 공은 죽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공과 구멍의 위치에 따라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하는 다양한 스윙 방식이 있었으니 골프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의 놀이였다. 여기에 개인전은 물론이고 수십명이 함께 조를 이뤄 펼치는 단체전 방식까지 봉희로 즐겼으니, 웃음소리 가득한 아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조선시대의 흐뭇한 골목길이 연상되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군사들이 익혔던 전투훈련 중 하나였던 격구가 민간으로 흘러들어가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변화한 모습은 무예 또한 명확하게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단순한 전투기술로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문화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것이 바로 무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공놀이가 조선은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발전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에 골프(Golf)라는 신종 스포츠가 대중적으로 정착하게 된 현실을 보더라도 그 의미성은 유효하다고 본다. 필자가 무예에 미쳐 사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