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데,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고교시절 배웠던 이조년(李兆年)의 시 다정가((多情歌)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중년이상이면 누구나 외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난 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험을 대비해 필수적으로 외웠을 뿐 배꽃 피는 시기에 대한 추억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서다. 처음엔 안 그랬다. 시골서 과수원을 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흰 배꽃의 기억은 그 야말로 환상 이었다. 배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하는 풍경 때문 이었다. 더군다나 달빛까지 내리는 저녁이면 눈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워 어린 나이에도 감탄이 절로 나오기 일쑤 였다.
아마 중학교때 까지 였을것이다. 유학 이랍시고 서울서 학교를 다닌 덕분에 주말이면 간혹 집으로 내려와 느끼는 감정 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시골집에 간다면 학교 친구들의 부러움도 샀다. 낭만과 목가적인 전원의 풍경을 애기하는 친구들의 말을 우쭐하는 폼으로 들어주던 그때. 바로 요즘과 같은 시기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가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농사를 도울 일이 한 두가지씩 맡겨 졌고 한달에 한 두번 집에 내려 올 때마다. 보모님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다. 그 시작은 언제나 배꽃이 필무렵 이었다. 배꽃이 하얗게 과수원을 밝히고 은은한 꽃향기기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일을 하는 시기로 변해 나무밑에 계분을 주고 산업화의 영향으로 줄어든 꿀벌 대신 수정작업을 해야 했다, 따가운 봄볕과 역한 퇴비냄새가 그렇게도 싫었다. 중학교 시절까지 느끼던 ‘이화에 월백하고…’가 어느덧 기피의 대상이요 웬수(?)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나 잘했나. 공부조차 변변히 못하면서 무엇에 정신이 팔려 방황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니 부모님 마음이 오죽 했겠는가. 서울까지 유학 보내 놓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지 어쩌다 집에 내려오면 일하기 싫어 꾀를 부리기 일쑤니, 어지간히 속이 타셨을게 분명하다.
그땐 왜 그렇게 일하기가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힘들 일도 아닌데. 하나의 배꽃에서 과일 한 개가 열린다며 애지중지 하던 부모님의 주의 사항을 들었으면서도 괜한 심술에 배꽃을 훑어 뿌리기까지 했으니 철이 없어도 한창 없었다.
배꽃이 지면 구슬만한 열매가 맺힌다. 사실 과수원일은 이때부터 시작이다. 가을의 든실한 과일로 자라게 하기 위해 또 한 번 솎아 주어야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착색을 좋게 하기위해 열매 하나 하나에 봉지를 씌워야 한다. 대 중 소봉으로 나누어 세 번씩. 어디 그뿐인가 병충해 예방을 위해 수시로 소독을 해야 하며 여름에 들어선 바닥에 난 풀을 수도 없이 깍고 베어내야 한다. 그래도 돌아서면 무릎까지 또 올라오기 일쑤다. 가을이면 풍성함에 손놀림은 가볍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이같은 일을 10여년 가까이 매년 되풀이 하시면 평일과 휴일 구분 없이 하셨다. 그리고 나를 비롯 우리 삼형제를 키우셨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시고. 사정만 다를 뿐 어느 부모가 이처럼 안했을까 마는, 공직생활을 하셨던 아버님과 어머님은 뒤늦게 시작한 농사라 그 고생이 아마 배는 더하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모의 힘을 덜어드릴 생각은 커녕 배꽃필 무렵부터 과수농사를 짓는 여름. 가을철 내내 요리조리 요령만 부린 어리석은 행동으로 일관 했다. 어쩌다 하는 일인데도. 이러한 우매함은 군대 제대할 무렵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 한다.
그로부터 약 8년후 부모님은 과수원을 정리하고 도시로 나오셨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별로 변한게 없었다. 결혼하고 자식낳고 살아가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오히려 더한 걱정을 끼쳐드리기 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덧 당시의 당신들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지만 지금까지 ‘반성의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해 드리고 있다. 세월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