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인문학당’에 단초를 여는 강의엘 다녀왔다. 여느 강좌와 아주 많이 달랐다. 클래식 선율이 강하면서도 감미롭게 울려 퍼지는 시작에서부터 지극히 ‘인문학적’이었다. 모인 분들도 몹시 다양했다. 아주 젊은 청춘들에서부터 여든이 훌쩍 넘어 보이시는 노신사 어르신들, 한껏 멋을 내신 화려한 엑스 세대 액티브 시니어들, 우아한 모습의 공부하는 주부 ‘중년 공주’ 여성분들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사랑하는 학습시민의 모습은 실로 다채로웠다.
길고 긴 강좌가 끝이 나고도, 사진을 함께 찍으시겠다고, 사인을 받으시겠다고 긴 줄을 서셨던 그 분들의 배움에의 열정이 크나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참으로 많은 시민 강의를 다녀 본 필자로서도 결코 흔하지 않은 극히 이례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다. ‘옛 것을 익히고 그 것을 살려 새로움을 안다’라는 ‘온고지신’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야 비로소 새로움이고, 혁신이고, 발전이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착각적 세태’에 묵직한 경종을 울린다.
옛 것의 소중함, 오래된 것들의 가치로움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귀한 삶의 지혜다. 소중한 것들을 너무도 많이 너무도 빨리 잊고 살아가는 망각의 시대에 온고지신은, 동서양의 위대한 고전들은 세상에 족적을 남긴 큰 스승들의 삶의 지혜를 만나는 인생교과서 그 자체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에게, 빵의 문제를 넘어선 삶의 본질적인 숙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귀한 해답을 알려준다. 가히 인생학교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삶을 종결지으며 죽어갈 것인가? 그 어려운 인생 화두에 답을 구하려는 우리에게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답을 울림으로 전해준다. 어제의 가르침으로 오늘을 살고, 오늘의 삶으로 내일을 열어가는 참으로 의미 있고 귀한 ‘세상살이의 길라잡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가. 요즘 부쩍 도시 곳곳에 동네마다 고즈넉한 배움의 인문학당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들도 지자체들도 앞다투어 인문학의 열기에 빠져들고 있다. 필자가 있는 대학에도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총장님과 교수님들이 함께 모여 인문학을 공부하는 ‘브라운백 인문학 미팅’이 인기다. 동서양의 문(文) 사(史) 철(哲)을 넘나드는 인문학의 향기가 그대로 배어나는 참으로 공부하고 싶은 유혹이 절로 드는 인문학 공부방이 점심시간을 내어 짬짬이 마련된다. 공자의 논어에서부터 오리엔탈리즘 강좌, 다산 선생의 실사구시 강좌, 그런가 하면 서양 철학자 탐구와 세익스피어의 오델로와 한국 현대 문학작품 저자 직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동서양의 지혜를 넘나드는 현대판 아고라 같은 인문학당이 열린다.
일찍이 공자는 제자인 자로를 통해 자신을 한마디로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라 전한 바 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으뜸 가는 큰 기쁨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많이 아는 자’가 그 일을 좋아하는 자를 따를 수 없고, 그가 또한 그 일을 진정으로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하였으니 그 또한 배움의 즐거움으로 인문학을 만나는 우리에겐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도 큰 가르침을 전하는, 시대를 앞서간 ‘세기의 혁신가 스티브 잡스’가 생각난다. 그는 애플의 CEO보다도 오히려 최고의 ‘인문학 CEO’로 불리고 싶어할 만큼 인문학적 통찰력과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시대를 여는 사람들의 최고의 달란트 코드로 삼았다 한다.
후학들과 함께 인문학의 르네상스를 열어 가시는 선학들의 지혜가 오늘 따라 유독이나 존경스럽게 다가온다. 은퇴를 하시고 낙향하시어 남쪽 따뜻한 곳에서 ‘지금 여기’ 인문학당을 여신 교육학 원로학자들이 꽤나 계신다. ‘온고지신’의 고전을 그윽하게 만나는 그 곳 인문학당의 영혼을 울리는 ‘글 읽는 소리’가 예까지 전해지는 듯 하여 문득 ‘망중한(忙中閑)의 성찰적 행복감’을 함께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