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사회나 초기 국가사회에서의 성년식은 사회적 의미가 컸다. 성년의 단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비로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 왔다
그러한 의례중 하나가 육체적 고행을 감내 시키는 것이다. 가장 성행 한 곳이 아프리카였다. 아직도 많은 부족들이 얼굴이나 등에 상처를 내어 특별한 표식을 하는등 육체적 시험을 치르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년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한시대 마한에서 소년들의 등에다 상처를 내어 줄을 꿰고 통나무를 끌면서 그들이 훈련받을 집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려 시대부터는 육체적 고행극복 보다는 관례를 중요시하며 성인으로서의 예절을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켜야 함을 일깨우는데 중점을 뒀다.
주로 사대부 계층에서 이루어진 이같은 성년식은 주자가례에 따른 관혼상제 의식에서 비롯됐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관례는 관혼상제의 첫 번째로서 남자아이에게는 15세와 20세 사이에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리고 복건, 사모, 탕건을 씌워 주는 의식이었다. 관례를 통해서 젊은이들이 아동기를 벗어나 성인으로서 거듭나게 하기 위함 이었다. 15세가된 여자에게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준 계례 의식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머리를 얹고 자주색을 댄 옥색회장저고리와 겹치마를 입히고 당의나 원삼에 노리개까지 곁들인 화려한 모습으로 치장해 여자아이에서 여인네로 거듭 난 것을 축하했다.
관례는 한번에 끝나지 않고 세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히고 모자를 씌우는등 성대하게 이뤄졌다. 오늘날 성년이 된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의례만 치룬다고 다 성년으로 인정한 것 은 아닌 모양이다. ‘관례를 치렀어도 성인으로서의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을 마치도록 성인이 됐다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으니 말이다. 마침 오늘(18일)이 성년의 날이다. 겉과 속이 꽉찬 동량(棟梁)으로 키우는 일, 우리 모두의 책임은 아닌지.
/정준성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