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가뭄을 ‘한(旱)’ ‘대한(大旱)’으로 표시하고 그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가뭄의 정도는 모두 굶주림의 상태로 표현해 놓고 있다. 옛 문헌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약 2000년 동안 가뭄에 의한 피해는 총 304회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 인상식(人相食), 즉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할 정도로 극심했던 경우가 23회, 자식을 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았다는 대기근이 82회, 나무뿌리나 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던 기근이 199회였다. 평균 6년마다 가뭄 피해가 있었고, 20년에 한 번 정도로 대기근이 나타났다는 얘기다.
선조들은 이럴 때마다 가뭄을 최악의 자연 재해로 보고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왕조시대만 하더라도 임금은 궁궐을 떠나 바깥에서 정무를 보고 기우제를 지내는가 하면 수라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등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했던 것도 그중 하나다.
농경사회에서 가뭄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또한 농업이 중요한 생업이던 전통사회에서 농작물의 생육과 관련하여 가뭄은 절대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에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와 하천의 수량을 측정하는 수표(水標) 등이 발명된 것도 가뭄에 대한 절실한 관심에서 유래한 것이다.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면 어린 자식이 열병 앓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괴롭다. 그리고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과학이 발달 했다고는 하지만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인 게 현실이어서 더욱 그렇다.
100년 만에 사상최악의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이 꼭 이런 형국이다.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수확기이지만 말라 비틀어져가는 농작물, 식용수마저 모자라 제한급수를 받고 있는 주민들, 대한민국이 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만 모두가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앞으로도 해갈에 도움을 주는 비 소식은 없다. 오히려 남자아이(엘리뇨)와 여자아이(라니뇨)들만 더욱 기승을 부려 이상기후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우려 섞인 예보뿐이다. 사람이 촉발시킨 재앙,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 두렵다. /정준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