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은사발
/이재무
제사를 지낸 다음 날
식전이면 엄닌 내게
심부를 시키셨다
대추 밤 사과 배 감
시루떡 인절미 조청 등속이 담긴
은사발 양손에 받쳐
가슴에 품고 연이네와 당숙네
먼 일가뻘 은범 아저씨네로
사방 시오리 돌고나면
두 다리 뻐근하고
등허리 대활처럼 휘어졌지만
마음의 풀밭엔 기쁨의 이슬이
영글게 맺혀 있었다
은사발 돌리면서 팔뚝과 장딴지
가쟁골의 칡뿌리로 굶어져 갔고
신발의 문수 몇 번 바꾼 이제는
책보 들던 손으로
때묻은 서룰를 들고 돈을 세다가
마음과 몸
밀물 앞에 모래탑처럼 무너질 때면
그 날의 은사발 그립고 간절해져서
고향에 달려가지만
어디에도 은사발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 홍수가 났던 지난 해에는
먼 마을에서 온 구호물자 앞에서
이웃끼리 얼굴 붉히었단다
시인이 제사를 지낸 가족사를 본다. 너나없이 경쟁의 속도전에서 시달리고 있다. 들에 핀 꽃 한송이, 길가에 뒹구는 돌맹이 하나에 맘을 뻬앗길 여유가 없다. 현실로 돌아보면 구슬픈 시절이 돌아온다. 누구나 고향산천에 담은 냄새가 있고 그 냄새는 지우랴 지울 수 없다. 새벽녘 먼동이 터오기 전 간간히 들려오던 부엉이 울음소리도 그칠 쯤 이면 시골밥상의 연기는 오래전 비워있고 늦은밤 잠자리 이불을 펴고 눕는다. 서로 슬픔과 기쁨을 나누던 옛마을이 이제 없다. 명절날이어도 친구들과 조우하는 일도 드물다. 각박한 문명이기에 고향추억은 잠시 머물었을 뿐 더 무엇을 요구하지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마음속의 고향에 우리들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병두 시인·수원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