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서를 쓰다
/서정임
선지 위에 굵은 ㅡ 획을 쓰자
갈필처럼 여러 갈래 갈라진 길들이 뻗쳐 나온다
군데군데 움푹 팬 틈이 생긴다
메마른 붓끝에서 나온 저 평탄치 못한 생각의 결이
그동안 내 발목을 접질러 놓았던 것인데
천수관음처럼 수천 개 손을 내밀어 나를 유혹했던 것인데
가닥가닥 헤아릴 수 없는 세필 같은 회한이
등뼈를 타고 흘러내린다
타닥타닥 불꽃을 세우는 통증이 전신을 훑는다
열린 창밖이 어둡다, 갈아놓은 먹물처럼 맑다
ㅡ 심 ㅡ 획 격서를 쓴다
지나온 길들을 지우고 나를 지우자 탄탄대로다
-서정임 시집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중봉직필(中鋒直筆)에서 중봉이란 붓의 뾰족한 끝 부분이 어느 방향이든 모든 획의 정중앙을 지나야한다. 직필은 붓대가 지면과 직각을 이루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필관을 야물게 잡아야하는 서예의 기본 필법이다. 중봉직필(中鋒直筆)과는 반대로 측필편봉(側筆偏鋒)은 붓을 좌우로 흔들어 붓끝을 필획의 측면으로 쓸며 재주를 부린다. 어설픈 기교보다는 자신만의 새로운 장르, 리메이크 곡들이 재조명을 받듯 불후의 명곡을 부를 수 있어야 가능한 필법이다. 내 발목을 접질러 놓고 나를 유혹했던 손가락은 결국 나였다. 내 몸이 아픈 마음을 받아낸다. ㅡ 심 ㅡ 획 화살촉처럼 날아가는 격서를 쓴다. 평탄치 못했던 생각의 결과 지나온 길들을 지우고 나를 지운다. 이제부터 탄탄대로다. /김명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