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유무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인류가 절망 속에서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 구원을 역사한다고 믿었던 신이, 인간의 고난을 보면서도 침묵만 지킨다면, 신과 인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이런 회의를 지금 종교가 직면한 조난이라고 한다. 기독교 철학에서는 인간이란, 신을 배반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신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자유 속에 내던져진 타락한 존재라고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침묵하고 있는 신 앞에 단독자로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할 길이 없게 됐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은 개체로서의 불변의 자아를 가진 존재라고 한다. 즉 개체아(個體我)로서 자기의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불멸의 ‘아트만’이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과 수행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내생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불변의 자아’를 부정한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關係)의 세계에서 어떤 인연을 만나 관계를 맺어 발생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유전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생명이 곧 자아임을 깨달으면 “과거와 미래가 오로지 현재로 통합되어 현재 속에서 자아가 곧 생사를 초월한 우주의 법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곧 초월의 길이 된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수행의 목적을 ‘解脫’에 두고 있다. 유교는 인간의 육체적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자연적이며, 우주적인 존재성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교에서는 자아를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여, 신명을 다 받혀 부모를 받드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요 사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주는 물론 국가 내에서도 지역, 종족, 근친 등으로 축소함으로써 인간을 우주만물과 연계된 존재로 확장하는 개방성을 갖지 못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자유란 도덕의 법칙인 ‘절대적 실천이성’에 구속될 뿐이라고 했다. 이런 사상을 이어받은 계몽주의는 도덕적 기반으로 선험적 이성(先驗的 理性)을 주장했지만, 19세기 후반 진화론의 등장으로 이성의 근거는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인간은 도덕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종교나, 도덕·이성(理性) 등의 모든 정신적 가치체계를 벗어던지면 자유라는 행복의 이상향이 다가올 줄 알았으나, 그런 환상은 간데없고 방향을 상실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매달려 구원을 갈구하는가 하면, 허무주의를 수용하고 향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게 됨으로써, 정의와 도덕은 공허한 구호로 변해버렸다. 외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얻은 자유는 마침내 인간을 ‘무(無)’앞에 내 던져 버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과학적 실증주의는 인간을 결정론 속으로 몰아넣었고, 도덕적 허무주의는 그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가 되어 힘은 정의이고 강자의 덕은 지배의지로 변신했다. 그 결과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은 산산이 조각났으며 전쟁과 폐허는 20세기가 태어난 요람으로 작용했다. 정신적인 허탈과 절망, 인간이성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 종교와 권위에 대한 불신 등은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하여, 믿을 것은 감각뿐이라는 허무에 빠져, 최고의 가치를 감각적 쾌락에 두었다. 쾌락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은 돈이고, 권력과 재산은 성공의 목표가 되어 어느덧 황금의 신(Mammon)은 인간을 지배하는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하여 매스컴을 전도사로 고용하고 광고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매스컴의 광고만큼 인류에게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제까지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제 인류는 매스컴의 지시에 따라 같은 정보를 공유하면서 반복되는 조명을 받으며 조건반사를 일으키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