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버스 안에 갑자기 “대박!”이 터졌다. 고교생의 외마디에 보니 건너편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피자집 오토바이와 버스가 부딪혀 알바생일 법한 젊은이가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 지경에 “대박”을 외치는 게 요즘의 언어 현실이라니, 한참이나 씁쓸했다.
그러고 보니 ‘대박’이 우리의 표현을 평정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자주 본다. 2년 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까지 “통일은 대박”이라고 만천하에 띄웠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당시 평소 품격과 다른 뜻밖의 표현에 어리둥절한 외신들이 ‘잭팟(jackpot)’으로 번역을 했다는 둥 지면을 한동안 장식했던 것이 새삼 돌아뵌다. 그 후로 대박이 더 많이 쓰이는 것인지는 확인한 바 없으나, 일단 대중의 인기를 얻은 말로 자리잡으며 대박은 그야말로 대박 행진을 계속했다.
‘대박’의 사전적 뜻은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주로 ‘대박이 터지다’의 형식으로 쓰여 ‘흥행이 크게 성공하다’, ‘큰 돈을 벌다’는 뜻을 나타내니 개업 인사말 등에는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의미 덕에 한때 신용카드사에서 새해 인사로 쓰며 유행을 일으킨 “부자 되세요”를 “대박 나세요”로 대체했는데 대부분 개의치 않고 써온 것이다.
하지만 대박으로 많은 표현이나 인사말을 손쉽게 대체하는 현상에는 문제가 있다. 어법상 맞지 않는 표현(‘대박 나세요’는 ‘대박 나시기 바랍니다’나 ‘대박 내세요’라야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 간의 호응이 맞음) 같은 지적은 한때의 유행으로 지나갈 거라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국립국어원의 문제 제기에 끄떡없이 자리 잡던 국적불명 신조어나 유행어 중에도 거품 빠지듯 사라진 게 많으니 말이다. 더욱이 언어는 언중(言衆)이 쓰는 대로 살아나거나 사라지거나 재위치되는 특성상 변화의 가능성이 늘 전제된다.
그런데 단어 하나로 여러 경우에 두루 쓰는 현상은 표현의 빈곤화라는 면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표현의 주체인 우리의 감각에 맞는 표현들을 다양하게 개발해나가도 모자랄 판에 ‘대박’으로 많은 표현을 대체하면 언어의 빈곤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좋아도, 싫어도, 놀라도, 어이없어도 “대박~”하고 마는 경우만 봐도 많은 표현을 버리는 셈이다. TV방송에서도 현지의 음식 맛을 묻거나 무슨 축제의 소감 따위를 물을 때 엄지 치켜들며 “대박~”하면 끝장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시청자도 별 이의 없이 최고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듯 싶지만, 그때마다 다양한 우리말을 잃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 곧 인품이라는 사실은 오래된 상식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부터 사람살이나 역사 등등 어떤 일이건 사상이건 표현이건 다 언어를 통해 전해지고 기록되고 남게 된다. 노래나 그림 같은 시각예술은 덜 하지만 모든 예술이나 학문도 언어로 정리되고 정립되어왔으니 그 힘이나 소중함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줄여 쓰기 놀이라도 하듯 많은 표현을 하나로 통일하면 사유의 폭이 그만큼 좁아짐은 물론 표현력이나 창의력 등의 저하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박 좋아하다 쪽박 찰라’라는 옛말이 맞을까봐 지레 염려했던 것도 생각난다. 실제로 ‘통일 대박’이 ‘쪽박’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많은 사람이 이 말의 우려를 삼키는 중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쓰기 어려운 표현으로 보인 ‘대박’이라는 말을 내세운 뒷감당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다른 표현을 썼다면 주목은 덜 받았을지 모르지만 훗날의 수습이 좀 낫지 않았을까 되작여진다.
사실 ‘대박’ 자체는 죄가 없다. 책도 영화도 사업도 대박이 나면 큰 성취요 성공이니 더없는 응원과 기원의 표현이다. 그래도 도박이 아니고야 땀과 눈물 등의 과정이 없는 대박이란 없다. 희망에 대한 희망의 말로는 좋은 대박, 이제 좀 다양한 표현을 보고 싶다. 작고 낯익고 덜 띄어도 꼭 맞는 표현을 찾아 쓰는 말맛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