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rks of Genius(한국어판·생각의 탄생)’의 저자 루트 번스타인(Robert & Miche`le Root-Bernstein)은 지난 1월 세미나 차 내한 인터뷰에서 한국인과 유대인의 토론문화차이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인과 유대인은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다. 특히 지식욕이 왕성하다는 점이 그렇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엄청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지식에 대한 논쟁에 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문화는 토론이라는 의견교환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데 대하여 한국문화는 다른 사람들과 타투지 않고 두루두루 잘 지내기 위해서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 유대인들은 논쟁을 통해서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의견이나 관점이 서로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의견과 관점이 달라야 더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고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의식과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우호적인 논쟁이 격의 없이 이루어지고 지식에 대한 토론이 생활화 되어있다”고 했다. 한국인에 대한 것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는 유대인들처럼 지식에 대한 토론 그 자체를 위한 우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문화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가 보아도 의견이나 관점이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게 되면 거의가 대결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가까이 살았던 우리 역사에서 500년 동안 지속했던 유교문화에서는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지(智)’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덕목을 ‘불변의 규범’으로 정해놨기 때문에 그것에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한 논쟁과 대립은 있어도 합리적 토론은 있을 수 없었다. 다툼을 피하려고 친한 사람들끼리만 나눠서 모이는 혈연·지연·학연과 같은 비민주적인 관계적 모임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합리적인 토론을 위한 공론의 장(場)이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이 지조 없는 행동으로 매도될 뿐만 아니라 극한대립이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 일반화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는 다수를 위한 다수의 정치이면서 동시에 합리성의 제도다. 그래서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의견을 놓고 토론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타협과 양보 그리고 조절과 합의라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이념이나 개인적 신념은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선과 아집(我執)은 민주정치의 병폐로서 투쟁과 파국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그 작동원리는 대부분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하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차선이 안 되면, 차 차선을 선택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유교적 의식을 지우지 못한 채, 민주정치가 모범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정치권에서조차 관계적(關係的)인 의리를 내세워 끈끈한 사적관계를 결속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나 기업인들이 죄의식 없이 ‘의리와 관계’를 내세워 부정·부패에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주사회에서는 ‘의리나 관계’는 ‘공적 자산을 사적으로 전용하는 인맥자산’이라고 하여 부정부패의 전형으로 본다. 민주주의란 헌법이라는 규범(規範)에 충성하는 정치제도인데도 의리에만 매달리려 하고 있으니 대화가 아닌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근대 서구의 사회이념은 ‘어떻게 하면, 여러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공공(公共)이 문제였지만, 유교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하면 개개인의 수신을 통한 순종(順從)의 사회를 실현할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아직도 그런 인습을 미덕으로 알며 따라가고 있으니 우리에겐 민주정치란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