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웠던 한파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 봄이 오고 있다. 계절이 변하는 이 시기에 세상의 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던 국회의 필리버스터를 졸업 후 35년이 지나 실시간 방송을 통해 처음 경험하게 되었는데 굳이 국회까지 찾아가 방청하지 않아도 24시간 언제라도 시청할 수 있는 중계 시스템으로 사회 환경이 변화되었다. 참 신기하여 시도때도 없이 스마트폰 어플로 들어가 보고 자장가 삼아 높으신 어른들의 진지하기도 하고 코믹하기도 한 장면을 베갯머리에 켜 놓기도 하였다.
사람과 인공지능의 대결로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벤트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재, 과학의 발달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보는 계기를 안겨 주었다. 물론 나는 인간 승리라 생각하며 이세돌의 팬이 되어 버렸다.
이 참에 법이나 재판에 관심있는 분들은 판사 대신 인공지능이 재판을 대신할 지 여부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나누고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재판을 대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쪽에 더 많은 의견을 갖고 있다. 사실 현재의 형사재판제도를 보면 대법원에서 정한 양형기준표가 있어서 그 기준대로 형량을 정하게 되면 사람인 판사가 내리는 결론이나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내리는 결론이나 거의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아닌 단순 기계에 불과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이번 바둑 대결에서 직관이니 낭만이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사람과 인공지능과 차이에 대해 표현되었다.
야구 경기 중계를 보며 스트라이크존 판정하는 화면을 볼 때 어쩌면 사람보다 기계가 더 정확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스트라이크존 판정을 사람이 아닌 기계에게 맡길 때 이 경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야구 경기가 단지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위한 목적하나만 일 수가 있을까? 바둑이나 각종 게임, 운동 경기 이 모두는 우리 사람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기록을 놓고 겨루는 육상경기는 시간 측정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기계에 맡길 수 있지만 만물 중 독특하고도 유일한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지각능력을 인공지능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설령 지각능력이 떨어지더라도.
재판은 둘 이상의 대립되는 당사자들이 중립적인 법원을 통해 공정하게 잔신들의 주장을 어필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며 스스로를 깨달아가는 가운데 적정한 수준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그 결과에 못지않게 매 순간 펼쳐지는 절차도 매우 중요하다.
사실 우리 삶이 다 끝이 있고 다 똑같지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과정이 아닌가? 재판과정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해소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가슴 깊은 곳 한 맺힌 사연을 토로하는 쌍방의 조율을 어찌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을까?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의 발달에 대해 인간이 얼마만큼 그 한계를 상상할 수 있을지.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간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줄 지도 모른다는 등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기계가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과연 도래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고 한편으로 그 통제 아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리하는 도구로 이와 같은 인공지능이 사용될 수도 있다. 나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람의 독특한 정신세계,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면역 반응 체계는 결코 규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와 인간은 조화를 이루며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역학관계 있어서 이 세계의 주인인 사람의 역할을 기계는 절대 할 수 없다.
단언컨데 사람이 먼저이고 우선이다. 재판은 절때 인공지능이 판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재판 외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