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전경 10곳을 뽑아 시(詩)를 남겼는데 5경은 소요정(逍遙亭)으로 ‘소요 유상(逍遙流觴)’을 지었다.
옥을 씻은 듯 한 청류(淸流) 굽이굽이 길기도 한데(漱玉淸流曲曲長)/ 난간 곁 산의 빛은 초가을 서늘함을 보내오네(近欄山色納新凉)/ 다리 위에서 물고기 구경하는 낙이 있으니(濠梁自有觀魚樂)/ 난정(왕희지가 놀던 정자)의 술잔에 대신할 만하다(可但蘭亭遞羽觴)
시간으로는 초가을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으며, 위치는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건물 군으로 옥류동(玉流洞)이라 한다. 이름의 주체인 옥류천은 우물에서 나온 물이 돌아서 흐르게 하는 곡수구(曲水溝)가 파여 있다. 그리고 여기서 흐르는 물은 작은 연못에 폭포처럼 떨어져 마치 신선의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시(詩)의 앞 두 구절은 옥류천의 유상곡수연과 소요정으로 들어가는 주변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세 번째 구절은 장자(莊子)의 고사(장자와 혜자가 다리 위에서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물고기의 즐거움을 논의)를 인용하였다. 장자의 글을 인용한 것은 소요정의 명칭이 ‘장자 내편1’의 제목이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지막 구절은 곡수(曲水)의 잔치로 유명한 왕희지의 시집인 난정기(蘭亭記)와 비교하였다. 이는 곡수가 경주 포석정과 같이 술잔을 띄워서 흐르게 한 후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이 그 술을 먹는 낭만이 이곳에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본다.
‘궁궐지’에 의하면 옥류천 일대는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고 소요정은 처음 탄서정(歎逝亭, 가는 세월을 탄식하는 곳)이라 적고 있다. ‘탄서정’의 이름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게 해주지만, 어감이 안 좋아서인지 이름이 소요정으로 변한다. 소요암에는 특이하게도 두 임금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 아래에는 인조가 쓴 ‘玉流川(옥류천)’이 있고, 위에는 숙종이 쓴 시가 새겨져 있다.
“폭포는 삼백 척인데(飛流三百尺),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遙落九天來),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看是白虹起), 골짜기마다 우뢰 소리 가득하네(飜成萬壑雷)”
아름다운 소요정에 대한 시는 숙종 이외도 많은 임금이 남기고 있어, 이곳이 얼마나 사랑받는 곳인지 짐작이 된다. 그리고 민간자료에도 이곳에 대한 시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는 대부분 정조시기에 만들어졌다.
소요정의 크기는 1칸(약 2평)으로 작은 편이며,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특별하게 뛰어난 건물이 아니다. 이곳의 주인공은 소요정이 아니고 이곳에서 보이는 ‘소요암과 옥류천’이 되며 소요정은 단지 이 경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일 뿐이다. 즉 소요정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라 여기서 보는 경치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정조가 ‘상림 십경’을 만든 시점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구절이 보이는데 ‘소요 유상’의 마지막 구절에서 술을 언급한 부분이다. ‘상림 십경’을 주제로 한 선행 연구는 2개가 있으며 모두 정조가 16세로 왕세자로 있던 시절 영조 43년(1767)에 만들었다고 적고 있고, 창덕궁 문화해설사의 해설도 이와 같다. 하지만 역사자료 어디에서도 ‘상림 십경’의 제작시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리 조선 시대지만 16세의 소년이 술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시의 제작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창덕궁을 떠나 경희궁에 머물면서 영조에게 군왕 교육을 받았으며 영조가 죽자 25세에 즉위하고 약 15개월 정도 머문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때문에 왕세자시절 경희궁을 떠나 창덕궁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본다. ‘정조대왕 행장’에서는 ‘세손(정조)는 금원(후원)에 꽃이 필 때도 나(영조)를 따라서가 아니고는 한 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어, 왕세자 시절 정조 이산은 아버지처럼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유희를 멀리하고 절제하면서 생활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립 십경’의 제작시점은 세자시절이 아닌 제왕시절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