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보리수건신회관 설립 박인자 씨
그해 아들의 나이는 9살, 하학길에서 트럭에 치여 종아리에 분쇄성골절상을 입게 됐다.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였던 박인자씨(53세)의 인생에 찾아온 이 느닷없는 사고는 어쩌면 그녀와 가족의 모든 일상을 송두리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키가 작다. 게다가 길치였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큰데다 뚱뚱한편인 나를 업고 낯선 북경거리를 걸었다. 땀을 뚝뚝 떨구며 들어선 길이 잘못되면 또다시 땀을 흘리며 돌아서 길을 찾아 헤맸다….”
그의 아들은 ‘나의 동년’이란 글에서 이같이 어머니를 추억했다.
아들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부부는 백방으로 병원을 찾아다녔고 3년 동안 어린 아들은 12차나 되는 수술을 견뎌내면서 차차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쯤 또 하나의 고비가 찾아왔다. 그녀가 뇌혈전으로 쓰러진것이다. 일년 반에 가까운 시간을 페인처럼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던 그녀에게 삶은 그토록 허무맹랑할수가 없었다. 적금이 바닥났고 빚까지 잔뜩 걸머쥐게 됐다. 언제나 든든하기만 했던 남편의 어깨가 한없이 처져있음을 발견한것도 그무렵이였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했다.
사실 녀자지만 그녀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스타킹꽃공예를 접한것은 우연히 TV에서 스타킹꽃에 대한 소개를 본후였다. 박인자씨는 곧 스타킹꽃공예기술을 연변에 인입하며 새로운 인재 양성의 길을 모색하고싶었다. 당시 그녀는 왕청 문관인재양성학교를 운영하고있으면서 여러모로 운영난을 겪고있는 때였다. 그녀는 북경과 대련에서 스타킹꽃공예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뇌혈전후유증으로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한 그녀가 섬세한 수공작업을 필요로 하는 이 기술을 배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자신이 첫 사람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왕청에는 이미 스타킹꽃공예가게가 버젓이 생겼고 주인의 솜씨마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하지만 워낙 쉽게 포기를 모르는 그녀는 체면마저 내려놓고 가게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들었다.
일주일 동안 꽃 300송이를 만들어낼만큼 이악스레 달라붙었더니 박인자씨는 끝내 스승으로부터 ‘합격’을 받게 됐다.
2007년 길림성 첫 수공예품제작양성학교인 ‘왕청 보리수공예품양성학교’가 왕청에 세워졌으며 그녀는 첫기 학습반의 학생들가운데서 인연이 닿은 학생 8명과 함께 학교를 운영해나갔다.
이후 그들은 이벤트, 민속, 인물, 식물 등 12가지의 다양한 분야에 쓰일 스타킹꽃공예제품을 개발해냈으며 2008년에는 연변보리수공예품유한회사, 2009년에는 연길 회흠공예품양성학교를 세워 스타킹꽃공예를 전 주 지역으로 넓혀갔다. 한편 인재양성과 공예품 회수,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진행하며 지역경제문화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 특히 많은 장애인, 실업자, 빈곤호들은 이가운데서 큰 도움을 받았다.
스타킹꽃을 만들면서 그녀는 특히나 주화인 진달래꽃에 관심이 갔다. 두견화를 제일 좋아했던 어머니의 영향일가, 그녀는 이 아름다운 꽃을 사시장철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진달래꽃 만들기에 달라붙었다. 3년 가깝게 주내 각 곳을 누비며 진달래를 살피고 관찰했으며 실내, 실외 장식용으로 된 여러가지 효능의 진달래꽃제품을 개발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실내외 꽃 전문가로 되였으며 연길시 국제호텔을 비롯한 주내 여러 단위들의 실내조경 제작도 도맡았다. 또한 진달래시리즈의 제품들을 개발해내면서 진달래꽃문화를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곤난앞에서 저는 좌절하기 앞서 먼저 문제의 해결방법부터 생각해봐요. 제 능력이 모자라는 부분에서는 이 일에 능한 사람들을 찾아 과감히 도움을 청하군 하죠.”
창업의 성공비결에 대해 박인자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과감한 도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지 못해요. 잠재력은 있으나 울타리안에 갇혀 자신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거죠.” 전혀 생소한 분야에 뛰여들면서 그녀도 막막한 미래에 불안해났던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곁은 지켜주는 가족이 있었기에 큰 힘을 얻을수 있었다. “힘들수록 힘이 되는게 가족이더라구요.” 박인자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진정한 경영인은 못된다”고 평가하는 그녀는 애초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창업이지만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보듬은 결손가정의 자녀나 고아들은 무려 33명, 지난해까지 모두 무사히 대학을 마쳤다.
이제는 좀더 여유를 갖고 건강을 챙기고싶다는 그녀, 지난 2014년부터는 연변보리수건신회관을 설립하고 금자탑에네르기방 개발에 심혈을 쏟고있다. 이 역시 박인자씨에겐 전혀 낯선 분야지만 그녀의 도전은 언제나 계속된다.
/글·사진=박진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