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달지 마!”
우리가 무수히 들어온 말이다.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위압적으로 수없이 쓰이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는 따져보거나 돌아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아니 ‘따지는 것’도 ‘토 다는 것’이나 진배없이 여겨지니 여차하면 불손하고 무례한 태도로 치부당하기 쉽다. 나아가 처벌의 수위 높이기에 악용될 소지마저 갖고 있다. 부부 같은 동등한 관계에서도 그에 따른 다툼이 잦다는데 상하관계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겠다.
여기서 ‘토’의 뜻을 다시 보면 단어조차 낯설 만큼 새삼스럽다. 여러 뜻 중 ‘말 끝에 그 말에 대해 덧붙이는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말에 무슨 말을 덧붙일 경우에는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 달지 말라’는 오래된 면박은 다른 말 꺼내는 길을 애초부터 막고 보려는 하명이다. ‘그냥’ ‘무조건’ 따르라는 불통을 무심히 대물림해온 관습이랄까. 그렇게 보니 이 말에는 상명하달 지시나 명령 같은 군사문화 냄새가 담뱃진처럼 끈끈하게 묻어 나온다. 우리네 뼛속까지 배어 있는 유교 문화의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은 당연히 포함사항이다. 아니 장유유서라는 미풍양속의 강요에서부터 길들여진 게 바로 입 다물고 그냥 따르라는 식으로 굳어버린 것이겠다.
토 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지금도 도처에 편재해 있다. 특히 직급이나 나이가 아래인 사람이 뭔가 이의를 달거나 말을 하려고 하면 제지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기만의 의견 개진이 좀 잦다 싶으면 눈치 없는 사람 취급이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토 다는 행위 자체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거나 위상 손상으로 보는 풍조 때문이다. 그러니 교수의 농담까지 꼼꼼히 받아 적어 시험 잘 본 학생이 A+ 받고 취직 잘 하더라는 명문대의 현실과 개탄이 지금도 반복되는 것이다. 반박이 새로운 학설을 열 것이라는 것쯤 상식이거나 하지만, 반박을 허용하고 경청하며 나아가 응원하는 교수는 아직도 많지가 않은 게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가부장적 어른문화의 영향일 텐데 독재를 만나면 더 강화되기 일쑤였다. 반박이나 비판에 대한 가위질이 독재의 방패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현 정부에서는 모든 통로를 자신의 지시만 따르는 비밀기지로 만들어 착복하며 토 다는 것을 더더욱 대역죄로 몰아갔다.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퇴직으로 미는 판이니 2015년 기자회견(그것도 회견이라면)에서 “대면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대통령 말에 와르르 웃고 넘어간 장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요” 한 마디라도 한 장관이나 기자는 없었던가, 기이하게 여긴 사람이 오히려 순진했던 것이다. 그런 장면들에서조차 토 달지 말라는 엄포가 시퍼렇게 겨누고 있었다니 국민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토 다는 맛을 알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새로운 희망을 느낀다. 일단 인터넷 댓글이 토 달기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는데 댓글족은 가장 활발히 자기 개진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하명만 받들지는 않을 것이다. 현 정권에서 비판적 예술인들에게 붙인 ‘블랙리스트’ 딱지는 오히려 “나도 블랙예술가다” 패러디를 촉발해서 토 다는 판을 키웠으니 활동이 전방위적으로 더 퍼질 것이다. 이제 시민들은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구시대의 인습 같은 하명이 느껴지면 즉각 뿔난 토를 달아 되돌려 보내는 식으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 토 한번 달아봐” 이런 마음이어야 새로운 삶을 쓰게 될 것이다. 나이와 자리가 높아질수록 토 다는 것에 관대해져야 함께 산다. 다른 의견의 허용은 경청이 되면서 사람의 품도 넓힌다. 토 달기와 잘 듣기야말로 다른 것의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고 집단지성의 힘을 살리는 길도 된다. 그런 마음이라면 더 재기발랄한 토 달기를 즐기며 새로운 일상을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