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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현륭원 병풍석(上)

 

인류문화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면서 변하기 어려운 것이 장례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지역환경과 정치, 사회, 종교, 경제, 기술에 영향을 받으면서 다르게 발전하여 나라마다 장례문화는 각기 특색이 있다. 중국 고대왕국의 황제릉은 산을 봉분으로 하여 그 크기를 상상하기 어렵고 고구려와 초기 백제는 방형의 피라미드로 되어있으며 일본은 전방후원형 묘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한반도의 장례문화는 통일신라 이전에는 지역별로 다양하였지만, 신라가 통일하고 난 후부터 통일신라의 규범이 이후 고려와 조선의 규범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왕릉이 중국과 일본과 크게 다른 점은 봉분의 병풍석과 그 주변의 난간석이라고 볼 수 있어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신라왕릉의 초기묘제는 석물 없이 거대한 봉분(지름-약 50m, 높이-약 10m)으로 조성하다가 점차 석물들이 추가된다. 이후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호석과 받침석을 듬성듬성 설치하는데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처리하였다. 7세기 말경 경주 배반동의 신문왕릉에서는 봉분을 감싸는 석재(봉분의 외부 하단을 감싸는 5단 벽돌형 석축과 갑석 또 이를 지탱하는 호석 44개)가 정식으로 생긴다. 8세기 중엽 조성된 성덕왕릉은 가공된 화강석으로 석축과 갑석 및 호석을 만들고 십이지신상은 부조형식이 아닌 조각상을 별도로 구분하여 석축 앞에 설치하고 외부에는 난간석을 추가하면서 한반도 왕릉의 틀을 만들게 된다.

한반도의 기준이 된 성덕왕릉의 묘제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병풍석과 난간석의 원류는 인도의 원시 스투파(석가모니의 사리를 묻은 탑)인 산치대탑(Sanchi大塔)에서 볼 수 있다.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봉분은 하늘을 상징하는 반구형 돔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돌 울타리가 있으며 울타리의 4방향에는 토라나(torana)라는 대문이 있다. 산치탑과 성덕왕릉의 관계는 당시 유물인 유리그릇과 서양인모양의 석인상 그리고 허왕후의 전설에서 인도와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 왕이 곧 부처다)을 가지고 있어 묘제도 부처처럼 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중국에는 이런 형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도문화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려왕릉의 묘제는 대부분 북한에 있어 정확한 연구가 발표되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사진을 참고로 하면 태조 왕건릉도 병풍석과 난간석 및 석인상이 있어 통일신라의 묘제를 이어받아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왕릉도 같은 형식을 유지하지만 특이한 점은 석상의 조각이 투박하게 보이는데 이는 신라와 조선의 조각을 비교할 때 매우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공민왕릉이 가장 완성도가 높고 석상의 조각수준도 앞 시대와 다르게 세련되어 이 규범은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왕릉은 고려의 묘제를 이어받아 내려오게 되지만 쿠데타로 임금이 된 세조가 묘제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세조는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죽자 “이번 장례(葬禮)는 임금의 장례가 아닌데, 모든 일이 정도에 지나친 것 같다. 그 무덤 안의 모든 일은 마땅히 한껏 후하게 할 것이지만, 무덤 밖의 모든 일은 비록 나의 장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박하게 해야 한다. 한갓 백성만 번거롭게 할 뿐이지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하여 검소한 묘를 만들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의경세자의 묘에는 석상 장명등과 잡상은 설치되지만, 병풍석과 난간석등이 없이 세워진다.

세조는 아들의 묘를 검소하게 한 것이 잘된 일로 생각하고 자신의 능도 검소하게 처리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병풍석이 없이 조성되고 이후 왕릉 또한 병풍석이 없이 조성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지만 대부분은 검약하게 만들어지지만 예외로 특별하게 만드는 경우가 나타나는데 바로 정조가 만든 현륭원이며 이는 다음 편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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