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왕릉의 규범은 이전시대 고려의 공민왕릉 규범을 이어받아 만들어졌으나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집정초기에는 정치가 불안하였고 사육신(死六臣)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세조는 자신이 기존의 임금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지 즉위 후 얼마 후 죽은 왕세자 의경세자의 장례준비에서 ‘무덤 밖의 일을 후하게 할 경우 백성을 번거롭게 할 뿐 죽은 자에게 유일할 것이 없다’라 하여 병풍석뿐 아니라 난간석과 문·무인석도 없이 조성하였다. 이후 의경세자의 묘는 왕세자 묘의 기준으로 내려오게 되며 세조 역시 자신의 묘를 간소하게 하라는 유지를 내려 예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조광릉에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후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의 묘는 간소하게 만들어지나 여러 이유로 국왕으로 추존된 경우 문·무인석이 설치되나 난간석만은 설치하지 않아 아마도 난간석은 실제 통치를 한 임금에 한해 설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왕세자의 묘에 난간석이 있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경릉의 의경세자 부인인 소혜왕후(인수대비)릉인데 소혜왕후는 남편이 죽어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어 대비의 역할을 하면서 7년간 수렴청정을 하여 직접 통치를 한 조선최초의 대비가 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묘는 남편과 달리 난간석과 무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두 번째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추존 문조대왕)로 그는 3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고 하며 그의 묘(수릉)도 난간석과 무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사도세자 묘는 왕세자 신분으로 규범에 의하면 난간석과 문인석 및 무인석까지 설치할 수 없었지만 최고로 아름다운 묘를 만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더해져 내려오던 규범이 무너지게 된다. 이장을 결정된 후 정조는 “천하를 위하여 자기 어버이에게 박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난간석과 병풍석의 설치를 명하는데 병풍석은 이전에 국왕에게도 쓰지 않았던 것인데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얼마 후 병풍석과 와첨상석은 설치하되 난간석은 제외하라고 하여 직접 통치하지 않은 사람은 난간석을 설치 않다는 규범을 지키게 된다.
현룡원의 석물 설치가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번 일을 사례로 삼아 이후에 병풍석, 난간석, 와첨상석등을 설치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자신의 건릉은 병풍석과 와첨상석이 없이 만들어진다.
최고의 왕릉을 만들고자한 정조가 아버지 묘에 설치하지 못했던 난간석은 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실제 통치를 한 사람에게만 설치되었다. 중국과 일본 황제릉는 규모가 커서 난간석을 만들지 않았는지는 모르나 동북아시아에서 왕릉에 난간석을 설치한 곳은 우리나라뿐이다.
우리나라 공원묘지의 풍경은 장방형의 묘가 줄지어 있고 묘는 대부분 외부를 석재로 만든 둘레석이 있고 상부에 봉분이 약간 나와 있다. 현대 묘소의 둘레석은 과거 왕릉에 설치되었던 병풍석에서 유래되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옛날에는 왕릉에만 설치되던 병풍석이 이제는 일반화되어 모두가 왕이 된 시절임을 실감하게 된다.
역대 대통령의 묘에서 병풍석이 있는 곳은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로 원형이고 박정희는 방형이며 김대중과 김영삼은 병풍석이 없는 원형이며 노무현은 화장하여 묘가 없다. 대통령의 묘에는 일부 병풍석이 있으나 난간석은 하지 않아 조선 이후에는 아무리 통치자라고 하여도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아 그 의미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묘의 주변에 난간석을 설치한 것은 인도의 불탑 산치스투파에서 볼 수 있으며 많은 석탑에도 난간이 표현되어 있어 난간은 불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난간석의 처음사용은 통일신라 성덕왕릉으로 이전과 다르게 많은 석물들이 설치되었고 이후 한반도 왕릉의 규범을 되었다. 당시 왕릉문화의 발전과 정착은 불교에서 받아들이고 왕즉불(왕이 곧 부처다)사상에서 불탑과 왕릉을 동일시하고자 만든 것 중 하나가 난간석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