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배후를 기록하다
/박미라
눈을 뜨면,
웅크린 역사 하나 응달쪽에 보일 것 같아
잠결인 듯 눈 감고
아까부터 따라오는 냉이꽃 냉이꽃만 바라보는데
마음에 자꾸 바람이 일어
꽃들도 생각도 한쪽으로 눕는다
이제는 제대로 짖지도 못하는 늙은 개에게
잘 있어 다시 올게
빈 말을 남기고 떠나올 때처럼 얼굴 화끈거려
창문 쪽으로 돌아앉으니 기차는 벌써 영산강을 건넌다
다시역 쪽으로 흘러가는 강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하니
나는 다시역을 보지 못했다
무작정 뛰어내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의 주소를 수소문하게 될까 봐
터지고 깨진 것들의 은신처 같은 다시역을
눈 감고, 눈 감고, 지난다
- 박미라 시집 ‘안개 부족’ / 애지
나주 어디쯤에 있다는 다시역. 하필 다시역일까? 한자의 뜻은 ‘많이 모신다’는 역(驛)의 개념에 잘 어울리지만, 시인의 감각은 재치가 넘친다. ‘터지고 깨진 것들의 은신처’라는 비유로 다시 올 시간에 대해 유추한다. 우리는 ‘다시’라는 말을 쉽게 불러내곤 한다. 실패에 대한 또 한 번의 기회로서의 다시는 얼마나 간절한가. 그러나 다시역을 못 본 척 눈을 감아야할 때도 있다. 삶이란 모르는 척 해야 할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들 소용없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쉬움을 다스리고 앞뒤 맥락을 다시 살펴보자.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위해서라도 마음속에 ‘다시역’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 일이다.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