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0 (토)

  • 맑음동두천 25.8℃
  • 구름조금강릉 27.3℃
  • 맑음서울 26.6℃
  • 구름많음대전 25.0℃
  • 흐림대구 22.6℃
  • 흐림울산 23.8℃
  • 구름많음광주 24.8℃
  • 흐림부산 27.2℃
  • 구름조금고창 25.2℃
  • 제주 24.5℃
  • 맑음강화 25.7℃
  • 구름많음보은 24.4℃
  • 구름많음금산 25.9℃
  • 구름많음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2.1℃
  • 구름많음거제 25.3℃
기상청 제공

[정윤희의 미술이야기]윌리엄 터너 ‘노예선’- 극악한 사회의 단상

 

옆으로 쓰러져 있는 선체의 부식된 면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 배의 운명이 될 줄을 짐작하지 못했을 거다. 녹이 슬고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덜룩해진 그 이미지는 이제 애처롭고 가련한 것들에 대한 표상이 되었다. 세월 앞에 무참히 부식되어가는 것들과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극명한 대비를 그만큼 우리에게 생생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은 마치 거센 물살을 무사히 견뎌내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때의 세월호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또한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우리내의 운명이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가 대기인지 분간하기 힘들 만큼 화면은 휘날리며 진동하고 있고 석양은 불안하게 초점이 흔들리고 있다. 본디 안개란 엷고 희미한 것이지만 작품에서는 안개가 매우 두텁게 칠해져 있고 게다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옆으로 누워버린 세월호의 부식된 선체와 터너의 바다는, 그처럼 거치고 얼룩덜룩한 평면으로써 처연한 인간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젊은 시절 위풍당당하고 잘 나갔던 터너는 중년이 되면서 점점 더 고립된 세계로 들어갔다. 젊은 시절에도 해양과 선박을 그렸었고 그것은 꽤 많은 인기를 얻었었지만, 중년의 터너가 1840년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이 작품을 선보였을 때 평론가들의 혹평은 쏟아졌다. 그의 작품이 마치 회반죽 같다며 조롱하기도 했고 그가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 있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터너는 젊었을 때부터 실험과 혁신을 시도했던 작가였고 항상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수채화보다 유화가 더욱 완성도 있다고 여겨지던 풍토 속에서 수채화를 절반 이상 작업하며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었다. 그는 수채화 작업을 할 때 캔버스 위에 물감을 아무렇게 흘려버리고는 캔버스를 도구로 사정없이 긁어댔다고 한다. 그러면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캔버스 위에 마법같이 드러나곤 했었다. 그의 수채화 기법은 유화의 기법에도 영향을 주어서 ‘노예선’과 같은 작품에서는 물과 대기가 수채화에서처럼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이러한 실험들은 처음에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실험이 고도로 진행되면서부터 주변의 불편함과 원성을 샀다. 터너의 기법은 너무나 혁신적이어서 당시 영국의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쟁취한 경제적 번영과 이웃 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적 상황으로 기세등등했던 영국 사회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색채연구를 해 독창적인 태양과 바다, 바람의 빛깔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워털루 들판’은 바다가 아닌 육지를 그린 작품이며, 수많은 이들이 들판 위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하지만 ‘노예선’과 동일한 주제와 기법이 화폭에 펼쳐진다. 그는 인간의 자만과 욕망이 불러올지도 모를 처참한 비극을 경고하고 있다. 이즈음 터너는 회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을 담아야 한다고 신념을 굳혔으며, 스스로 정확히 밝힌 적은 없었지만 예술가가 힘 있고 재력 있는 후원자들뿐만 아니라 후대인들의 역사적 평가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터너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의 대다수의 낭만주의 문학가와 예술가들은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는 영국 사회를 경계하고 있었다.

영국의 선박들은 식민지로부터 노예들을 배 한가득 태워서 대양을 건너곤 했다. 1833년 노예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노예매매가 아직 성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수색선을 만나기라도 하면 범행의 증거를 인멸하고 빨리 도주를 하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바다는 그처럼 무고한 생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삼키곤 했다. 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을 뿐더러, 때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던 터너도 완숙기의 예술가가 되면서는 극악한 사회의 단상을 차마 간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평면적인 요소가 극대화된 그의 회화는 간혹 100년 뒤에 성행하게 될 평면 회화의 등장을 예고했다고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 터너의 작품이 필자에게 보내오는 메시지란, 그처럼 처절한 현장을 그저 관조하며 스스로의 무력감을 실감해야했던,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간접적인 표현으로 밖에 토설하지 못했던 예술가의 처지이다.

 







배너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