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연극 무대에서는 현대인들이 보았으면 매우 기이하게 여겼을 상황들이 전개되곤 했다. 쓰인 글들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이미 지나갔던 장면이 반복해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분량의 대사를 마친 배우들이 퇴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머물기도 했었다.
극의 전개와 장면 전환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무대에 익숙해진 현대인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중세인들은 이를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대란 대사를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하면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그러한 인식은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였던 체사레 스깔리제르(1484~1558)는 당시의 연극무대에 대하여 ‘등장인물이 무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등장인물을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라고 논평했다.
이제부터 무대는 대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서서, 극의 시작과 끝, 무대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의 전체가 조화롭고 종합적인 인상을 전달해야했다.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듣는 것’ 못지않게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미술은 인문학, 문학, 과학 등 여타 분야들과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이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미술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술과 문학이 주고받은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서 르네상스의 두 천재, 단테와 조토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피렌체에서 1년 간격을 두고 나란히 출생했으며, 그만큼 동일한 역사와 문화의 환경 속에서 예술관을 성장시켰다.
당대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들이었던 만큼 단테는 조토에게서, 조토는 단테에게서 어느 정도는 영감을 주고받았다.
단테는 인생 최대 걸작인 ‘신곡’을 완성하기 2~3년 전, 조토의 벽화로 채워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곡’의 지옥 편에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벽화와 똑같은 장면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목에 돈주머니를 차고 있는 고리대금업자들이나, 루시퍼에게 몸통을 물려서 다리만 대롱대롱 내놓고 있는 사람은 스크로베니 예배당 ‘최후의 심판’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단테는 작품 안에서 이러한 장면들을 단순히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마치 실제 회화나 조각을 보는 것과 같이 섬세하고 시각적인 인상을 전달하였으며, 이는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회화와 건축, 조각 등 풍요로운 시각적 배경에 둘러싸여 작품을 완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조토는 회화 작품을 통하여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생동적인 인상을 연출해냄으로써 당대인들의 놀라움을 샀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건축주는 이 곳이 그 지역의 광장에서 매년 거행되었던 수태고지 축일의 전례극을 재현함으로써 지역 주민들의 사랑받는 명소가 되기를 원했다. 수태고지 축일에 아레나 광장에서는 마리아와 가브리엘 역할을 맡은 두 배우가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성경의 한 장면을 연기하곤 했었는데, 스크로베니 예배당 정면 가장 중요한 지점에는 바로 이 수태고지의 장면이 가장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조토가 이처럼 인물에게 생동감 있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포즈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천재가 아니었다면 건축주의 의도는 벽화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을 것이다. 경직성과 전형성을 띠고 있었던 비잔틴 양식과 중세 양식으로서는 나타내지 못했을 효과였기 때문이다. 조토 이래로 성경 속의 인물들은 인간의 살과 뼈, 그리고 인간과 똑같은 감성을 지닌 존재로서 표현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미술사가 조토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로 발돋움 했다는 데에 이견을 내지 않는다.
이처럼 르네상스 예술은 경직성과 고립성을 뚫고 나와 조화롭고 전체적이며 시각적인 인상을 추구하게 되고, 인간의 감각은 보다 풍요롭게 충족되었다. 하지만 풍요로운 감각이 늘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은 그전보다 더 쉽게 작품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