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독서
/김왕노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 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중 독서이기도 하네.
하루를 마치고 새색시와 새신랑이
부드러운 문자 같은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도 독서 중 독서이네.
아내의 아픈 몸을 안마해 주면서 백 년 독서를 맹세하다
병든 문장으로 씌여진 아내여서 눈물 왈칵 쏟아지네.
- 김왕노 시집 ‘그리운 파란만장’ / 시작시인선
“난 말미잘의 예민한 촉수가 하늘거릴 때 말미잘이 바다를 읽는다는 것을 안다. 양지바른 곳에 햇살이 가득 고여 출렁일 때 햇살이 오래 양지를 읽는다는 것을 안다. 나무나 풀의 가지런한 잎맥과 그물맥을 쓰다듬다 가는 달빛도 달빛의 독서인 것이다.” ‘e 수원뉴스’에 올라온 〈시인의 말〉 中 첫머리다. 시인의 시선 앞에서는 모두 한 편의 시가 되고 문장이 되어,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지 않는가. 상처를 더듬고 헤아리면서 때로는 조용히 바라보고 때로는 기다리고, 또는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던 독서. 그러나 맹세했던 백 년 독서는, 예전 같지 않은 아내의 그 병든 문장을 더듬다가 그만 왈칵 눈물을 쏟게 되는 것이다.
/김은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