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예술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가 쇠락하고 다른 나라의 침략이 잦아지자 향락적인 르네상스의 문화에 신이 노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다. 1545년 발족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경스럽고 외설적인 작품들을 정화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예술가의 활동에 간섭했고, 과거의 작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중세에도 예술에 대한 규제가 강했지만 이미 자유와 향락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예술가들에게 갑자기 찾아온 제제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충격을 받은 우리 사회의 예술가들 심정이 이러했을까.
하마터면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실제로 보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전해들을 뻔 했다. 인간의 나체를 터부시했던 트리엔트 공의회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가 외설적인 나체들로 가득하다며, 특히 예수의 얼굴이 수염이 나지 않은 너무 젊은 청년으로 그려졌다며, 교회에 그대로 두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황은 벽화 전체를 없애려고 했으나 인근 미술학교의 간절한 청으로 간신히 벽화는 살아남았고, 그 대신 눈에 거슬리는 몇몇 지점을 수정하기로 합의를 봤다. 미켈란젤로의 제자들은 성직자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지적한 인물들의 성기가 가려지도록 천이나 옷을 덧그려야 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발족 이후 성직자들은 예술 작품의 감독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교회의 주문을 받아 일정 크기 이상의 작품들을 그릴 때에는 이들의 지도하에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나체들은 더 이상 종교화에 등장할 수 없었다. 나체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이 작품에서 제거되어야 했으며 그러한 판단은 성직자가 맡았다. 중세에도 예술에 대한 교회의 규제가 강력했지만, 그건 예술가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몫이었을 뿐 성직자가 이처럼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종교개혁의 본거지였던 유럽 본토보다는 구교의 영향아래 있었던 이탈리아의 상황이 훨씬 나았다고도 볼 수 있다. 신교도들은 종교화를 감상하는 일이 우상숭배와 같다며 종교화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문이 씨가 말라버린 이들 지역에서 미술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풍속화와 인물화로 전향한 소수의 예술가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술 자체를 말살해 버리려는 신교도들과는 자신들이 매우 다르다며, 자신들은 문화예술을 부흥시키길 원한다고 말했다.
나체를 터부시한 교회에 대한 반발심이 일조한 덕분에 같은 시기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나체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작업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와는 다르게 많은 이들이 기존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에로틱한 장면을 화면에 연출하기 시작했다. 브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에서 큐피드는 얼굴은 아기천사이지만 몸은 나이에 비해 매우 조숙한 청소년이다. 나체의 여인 뒤쪽에 위치한 이 불경한 천사는 한 손으로 여인의 한쪽 가슴을 애무하고 있고 입은 그녀의 입술을 맞대고 있다. 브론치노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 시기 회화에서 큐피트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여인을 탐닉하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하에 있었던 교회의 성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새로운 유행에 낯설었던 이들은 기겁을 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를 일컬어 예술의 위기라고 한다. 종교개혁이 성공한 지역에서는 미술품 제작이 급감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일환이었던 트리엔트 공의회가 심하게 예술을 간섭했으며, 그나마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던 예술가들은 방향을 잃고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나쁜 일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예술은 그럭저럭 위기를 넘겨가며 새로운 경향들을 낳기 시작했다. 나체를 포기한 미술은 구불구불한 옷 주름의 양감을 살리기 시작하며 바로크 예술의 태동을 돕는다. 풍속화로 전향한 플랑드르의 예술은 따스한 햇살이 녹아든 일상의 아름다움을 소재로한 회화드로 17세기 절정기를 맞는다. 외설적이라 비난받아왔던 매너리즘 회화 역시 후대인들로 하여금 인간의 무의식을 비추는 작품으로서 그 가치를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