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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지소(紙所) 上

 

수원화성의 지소(紙所)는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수원화성의 외부시설 중 하나이다. 이 건물에 사용한 내역이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정조의 건축 중 의미 있는 건물로 볼 수 있다. 특히 왕의 건물에만 사용하는 취두(鷲頭, 용마루 끝에 있는 장식기와로 상당히 위계가 높은 건물에 사용)와 용두 및 잡상을 사용한 기록이 있어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소는 소(所)의 일종으로 특수행정 구역인 향·소·부곡에서 향과 부곡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소는 물품을 만드는 기술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의 종류로는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곽소(藿所)·옹기소(甕器所)·어량소(魚梁所)·강소(薑所)등이 다양한 공장이 생활에 필요한 제품들을 생산하였다.

수원 지소는 이렇게 많은 공장 중 하나인데 특별히 격을 높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의 종이역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제작연도가 755년으로 한반도의 최고(最古) 종이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시대는 목판과 금속활자의 인쇄술이 발달하여 종이의 공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는 종이 돈(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고 균일한 종이가 필요해서 세검정 근처에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공장(조지서)의 설립은 종이제작기술의 발달이 가져오고 최상 품질의 종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나라의 재정 부족으로 관영수공업이 부실화되면서 장인(匠人, 기술자)들이 떠나고 기술은 퇴보하게 된다.

18세기 후반부터 민간상업자본의 형성으로 민간수공업과 선대제수공업이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종이의 경우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장인들의 부족하였다. 다만 사찰에서 운영하는 사찰제지업만이 우수한 기술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19세기 전반 경제가 발달하고 종이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민간공업 발달로 이어진다. 이로써 종이제작 기술이 민간화가 되고 대량 생산으로 대중화가 된다.

종이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종이는 매우 귀한 물건으로 일반 백성은 접하기 어려웠다. 종이는 문서보다는 건물에 많이 사용했는데 종이의 대중화 이전에는 건물에 사용하지 못했다. 종이가 없으면 창문은 나무판문이고, 실내바닥은 흙이나 가마니로 마감하고 벽과 천장도 흙으로 마감하였다.

온돌방을 가마니로 마감하면 청소가 어려워서 항상 비위생적일 수밖에 없어 온돌방은 대중화를 이루지 못했고 특히 양반가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종이의 대중화는 한반도의 주택문화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창문에 종이를 발라 빛이 들어오게 하고 바닥에도 장판지를 깔아 청결의 유지가 쉬워졌다. 온돌은 민가와 양반가도 선호하는 문화가 되고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된다. 신발을 벗는 문화도 그 때부터 본격화 된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을묘년(1795) 가을 광교동 입구에 종이 뜨는 곳을 처음 설치하고 지장승(紙匠僧)을 모아 여러 종이를 떠냈다. 이 종이는 행궁의 수리와 계목, 공사 등에 필요한 것들이다.’라 하고 건물 규모에는 ‘지소가 21칸, 지장승이 묵는 암자가 6칸과 행각이 4.5칸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분석하면 공사 준공 시기는 을묘년(1795) 가을로 혜경궁의 행차가 끝나고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외정리소 설치와 연계되어 있다.

위치 선정은 닥나무를 심을 장소와 인접해야 하고 종이 생산과정에서는 끓이고 씻는 과정이 많아 땔감과 깨끗한 물이 많은 곳을 택했다. 그곳은 수원 인근에서 가장 큰 산인 광교산 기슭과 수원천(유천)이 만나는 곳이다.



이전 글에서 수원 사직단의 장소를 계속 이전한 이유와 광교산 기슭을 선택한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용 중 위치는 토지조사부의 ‘조원리 486’을 489번지로 잘못 인식하는 바람에 현재 사직단 안내판이 있는 곳이 아닌 그 아랫부분으로 판단하였다. 다시 검증하는 과정에서 현재 안내판이 있는 곳이 486번지이고 사직단이 있던 장소임을 밝힌다. 아울러 사직단지 관계자 및 독자 여러분에 고개 숙여 깊은 사과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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