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양난이 거치면서 재정 부족으로 장인(匠人, 기술자)들이 떠나고 관영수공업은 이름만 남은 곳이 많았다. 종이공장인 조지서(造紙署) 역시 장인이 없어 정상적인 운영이 되지 않았다. 정조는 평소 질 낮은 종이를 개선하기 위해 담당 관리를 파직하는 등 노력하였지만 재정의 부족과 수준 높은 장인을 구하지 못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792년에는 수원에 이전해온 사람 중 안성의 종이장인들이 있었고 정조는 이들에게 4천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빌려주어 지소를 운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성의 장인들을 이용하여 종이를 생산하는 일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의 기술이 생각보다는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을묘년(1795) 혜경궁의 환갑잔치가 끝난 후 행궁과 수원화성의 행사와 공사에 대해 정리를 하고자 외정리소를 이곳에 만들게 된다. 정리소의 결과물은 모두 문서로 만들어야 하고 또 왕실과 관련 문서로 좋은 품질의 종이를 많이 확보해야 하였다. 정조는 평소 종이제작에 고심하던 중 외정리소의 설치를 계기로 지소를 설치하고 이를 지원하게 한다.
수원유수 조심태는 좋은 종이 생산은 수준있는 장인을 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집단으로 결정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승려 종이장인(지장승)이다. 당시 사찰은 자급자족하여 필요한 제품들을 독자적으로 생산하고 있었고 특히 두부와 종이는 품질이 뛰어났다. 양난 후 관영수공업에 종사하던 종이장인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사찰수공업에 합류되면서 사찰제지업의 기술은 더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의 지소 건립의 내역을 보면 과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내용에는 왕을 상징하는 건물에야 사용할 수 있는 취두, 용두, 잡상 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심태는 지장승의 기술을 시험한 후 실력을 인정하고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당시 천민계급으로 취급되어 관리들에게 온갖 비박을 받았고 도시 인근 사찰은 관리들의 소풍 가는 장소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승려들이 지소를 운영하면 앞으로 생산되는 종이는 다양한 관리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지명한 일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소의 외관을 왕의 건물처럼 위계를 높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종이공장에 취두를 사용한다는 것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사회 통념상 임금인 정조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취두와 용두 및 잡상을 지장승이 묵을 암자에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도 취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취두와 용두 및 잡상이 일제강점기 사진에 보이기 때문이다.
지장승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지소(종이공장)의 외관을 위계가 높게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묵는 암자의 법당(6칸)에는 최고의 위계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용주사 법당(9칸)만큼은 크지는 않지만 이의 격식에 따라 건축하였을 것이다.
그동안 지소에 취두를 사용하였다는 오해를 일으킨 것은 성역의궤 재용편에 지소와 암자의 내역을 구분하지 않고 합쳐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화려한 암자를 지금 찾을 수가 없지만 그 터를 현 청련암으로 추정한다. 청련암의 위치는 지소가 있던 장소의 뒤편에 있고, 창건을 정조시기로 보고 있는 사중의 내력 때문이다.
지소의 지속적인 운영관리를 위해 둔전(屯田, 경비 보충용 농지)을 배당하고 또 매년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였다. 화영중기(1891년)에는 지소둔으로 밭이 87부4속, 논이 1결12부이고 해당 연도에 지출되는 쌀은 152섬, 돈은 427냥이라고 되어있다. 농지의 단위 1결은 약 1만㎡(약 3천평)가 되고 1냥을 2만원으로 보면 적지 않은 재정이다. 또 수원부 북부 양안(1900년)에서도 지고둔(紙庫屯=紙所屯)이 74부가 기록되어 있어 지소의 둔전은 구한말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