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는 힘이 세다
/임동확
아직 꽃피기에 이른 참싸리가 홍자색 꿈을 꾸며 두런거리는 봄밤, 정적과 평화의 순간은 잠깐뿐, 벌써 숙소 바로 앞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 담장 곁 청매실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길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저 멀리 썩은 굴피나무 둥지에 돋아난 노란 개암버섯들이 한낮 천년수 가는 길에 보았던 독사처럼 꼿꼿이 자루를 세우고 갓을 편 채 독을 뿜어내고 있다. 일사불란하게 군락을 이룬 채 흔들리던 동백나무, 비자나무 숲도 돌연 자유 시민이 되어 오직 각자의 명령과 보폭에 따라 흩어지고 모여들기를 반복하고, 북가시나무 위에선 미처 예측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소요와 고요의 기준점을 알려 주며 되지빠귀 새가 홀로 울고 있다.
그러나 끝내 미지로 남을 낱낱의 소리들이 밤의 계곡으로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속속 집결하고 있다.
- 임동확시집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 문학수첩
한낮에 독사처럼 꼿꼿이 자루를 세우고 갓을 편 채 독을 뿜어내고 있는 것들은 썩은 굴피나무 둥지에서 돋아난 노란 개암버섯들이다. 아직 꽃피기에 이른 참싸리가 홍자색 꿈을 꾸며 두런거리는 봄밤이다. 일사불란하게 군락을 이룬 채 흔들리던 동백나무, 비자나무 숲도 돌연 자유 시민이 되어 오직 각자의 명령과 보폭에 따라 흩어지고 모여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쯤에서 숲은 돌연 자유의지를 지닌 철저히 독립적인 세계가 된다. 이것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이 한층 더 깊은 눈으로 세계를 깊이 들여다 본 뒤에 오는, 껍데기를 벗은 세계로 되는 것이다. 이 시의 경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세계가 미처 예측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소요와 고요의 기준점을 제시하며 끝내는 미지로 남을지언정 자유의지를 가진, 게다가 씩씩하게 움직이는, 멧돼지처럼 속속 집결하는 힘 있는, 경이로운 세계로 변화하는 것에 있다.
/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