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5 (금)

  • 흐림동두천 29.3℃
  • 흐림강릉 30.6℃
  • 흐림서울 32.3℃
  • 구름많음대전 30.7℃
  • 구름조금대구 32.7℃
  • 구름많음울산 30.7℃
  • 구름조금광주 31.8℃
  • 맑음부산 32.0℃
  • 구름조금고창 32.7℃
  • 구름조금제주 31.6℃
  • 흐림강화 30.0℃
  • 흐림보은 29.2℃
  • 구름많음금산 31.4℃
  • 구름조금강진군 31.5℃
  • 맑음경주시 32.0℃
  • 맑음거제 31.0℃
기상청 제공

[정윤희의 미술이야기]조금 색다른 분위기의 최후의 만찬

 

꽤나 역동적인 모습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에는 등장인물들이 각양각색 다른 포즈와 표정을 취하며 활발한 움직임을 띠고 있다. 굴 속 같이 캄캄한 실내는 자연광이라곤 한 줄도 들지 않지만, 예수와 열두 제자에게서 영적인 강렬한 빛이 세어 나와 온 방을 환하게 비춘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 그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최후의 만찬 풍경은 활기마저 띠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들과는 거리가 좀 있다. 최후의 만찬을 모티브로 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아도 식탁은 수평을 가로지르며 놓여있고 제자들은 일직선으로 앉아있다. 하지만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식탁이 사선으로 놓여 있으며, 식탁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예수는 가장 밝은 빛을 내뿜으면서 화면의 구심점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반찬에는 예수와 열두제자만이 등장하지만, 틴토레토의 작품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고, 공중에는 여러 영혼들이 떠다니며 북적거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면이 어둡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앞둔 전날 밤의 숙연한 분위기도 일면 엿보이지만, 그보다는 등장인물들이 자아내는 활발한 분위기가 훨씬 더 두드러진다.

이즈음 이탈리아에서는 최후의 만찬 주제가 활발하게 그려졌다. 성찬식의 신비를 부정해버린 신교에 맞서, 성찬의 신비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주제를 많이 의뢰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틴토레토의 산 로코 대성당 벽화 ‘최후의 만찬’은 단연 독창적인 작품이다. 실리적이고 당찼던 베네치아 인들은 종교적 위기마저 남다르게 넘기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성직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부패한 교회 조직의 개혁과 자선에 많은 힘을 쏟았다. 종교적 위기와 함께 흑사병도 베네치아를 강타했던 터라 병자들이 교회의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할 때였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일평생 거의 베네치아를 떠난 적이 없었던, 자칭 뼛속 까지 베네치아 인이었던 틴토레토였으니, 그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당시의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바닷가에 위치한 베네치아 특유의 기후마저도 함빡 담았을 것이다.

성전의 측면 벽에 그려진 이 작품은 사선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하는 관객의 시선을 고려해 구도를 잡았다. 틴토레토는 다른 베네치아 화가들과는 다르게 피렌체의 작품들을 연구하며 탁월한 구도 감각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매우 손이 빨라서 어떤 이들은 그가 빗자루로 바닥을 쓸 듯이 그림을 그린다고도 말했다. 천재라찬도 손색이 없었던 그였지만 처음부터 승승장구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베네치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티치아노가 오래도록 장수했고, 그의 수제자 역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작품에 비교하면 틴토레토의 작품은 음침했고 기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틴토레토가 일약 스타로 자리매김했던 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산 로코 대성당은 벽화를 담당할 화가를 선발하기 위해 일종의 오디션을 치르기로 했는데, 어려웠던 재정 사정을 감안해 물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드로잉으로 시험과목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손이 빨랐던 틴토레토는 남들이 드로잉을 할 시간에 채색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고, 그것도 아예 교회 중앙에 그림을 그려버렸다. 그는 작품을 마친 후 이를 교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는데, 당시의 관례상 화가가 기증하는 작품이라면 교회는 무조건 수락을 해야했던 것이다. 교회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이로써 틴토레토는 유명세를 탔다. 틴토레토는 그가 가진 손재주만큼이나 약삭빠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베네치아에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약삭빠름이 아니라, 베네치아 인들 다수의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했던 그의 재능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사르트르는 틴토렌토를 “귀족의 미학에 맞서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과 입장을 대변하고자 한 저항가”로 불렀다. 계급 갈등이 아닌 종교위기가 화두였던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를 포착할 줄 알았던 틴토레토를 저항가만으로 볼 수도 없으니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일부만 맞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바닷가에 살면서 대부분 어업과 무역업에 종사했던 베네치아인들은 우울하고 위태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서로 협력하며 나름의 능동성을 발휘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최후의 만찬’에서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