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신비롭고 엄숙한 분위기의 성화를 기대했다면 이 작품은 조금 의외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아피아 가도에서 성 베드로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에서는 예수의 모습이 꽤나 생생하고 건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손과 한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그것을 워낙 번쩍 들고 있기 때문에 전혀 고통스럽거나 힘겹게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보고 놀라움에 몸서리치는 베드로에게 그는 나머지 한손을 곧게 뻗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감과 확신에 찬 모습의 예수이다. 성자의 모습보다는 우리의 주변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에 더 가깝다. 당시 교회는 정교분리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고, 정교분리를 의당 올바른 가치로 여기지도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카톨릭 교회는 예술가로 하여금 보다 강력하고 생생한 시각적 효과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성상과 성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신교와 정반대의 노선을 걸으면서 그것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언제나 예술은 교회의 선전수단으로 활용이 되어왔지만, 이번에야말로 그 효력이 강력해지기를 바랐다. 그 효과란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이 작품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종교적 내적 체험이 바로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을 말했다. 카라치는 그러한 카톨릭의 필요를 재빨리 인식해 작품에 실행했던 미술가로서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렸을 뿐만 아니라, 볼로냐에서 아카데미를 창립했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는 동료 미술가였던 그의 형 아고스티노 카라치와 사촌 형 루도비코 카라치와 함께 활동했지만 생동감 있는 인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기로는 단연 안니발레 카라치가 최고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예수의 모습은 신비로운 성자보다는 주변에 실제로 존재할 법한 사람의 모습이다. 뛰어나기 보다는 평범한 인물이고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자세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이다. 화면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졸고 있거나 예수의 부활을 보고 놀라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역시 매우 동적이다. 카라치는 인위적으로 대상을 왜곡하는 매너리즘 화풍이 그릇된 것이라 여기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미켈란젤로를 연구해 미켈란젤로의 사실적이고 건장한 누드를 자기만의 해석을 통해 캔버스에 다채롭게 펼쳤다. 주로 고전을 연구했지만 이탈리아 각지에 존재하고 있던 양식을 적절히 반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카라치가 고안한 새로운 양식은 아카데미 학생들과 후배들에게도 전수되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후대인들은 이를 바로크라 명명했다.
바로크의 시작을 알렸던 또 다른 중요한 화가가 있다. 바로 카라바조이다. 그는 미술 명문가 출신인 카라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인생 노선을 걸었던 화가였다. 술주정뱅이였으며, 어디서든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해 인생의 대부분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대단해서 망명지에서도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주 참회의 편지를 썼고, 참회의 의미가 담긴 작품을 그렸으며, 교회 역시 그의 재능을 요긴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자주 사면시켰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등장시켰다. 때로는 목이 베어진 범죄자와 악마의 모습으로, 천사를 보고 놀라 날뛰는 말에게 밟히기 직전인 성인의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리곤 했다. 바로크 화풍의 생생함에 더해 극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바로크는 ‘표면이 고르지 못한 진주’라는 뜻의 단어로서 이 시기의 미술 양식을 비꼬기 위해 후대인들이 고안한 말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많은 용어들이 그러하듯, 최초의 부정적인 의미는 희석되고 양식의 고유한 특성만을 담으며 그 시대의 미술 양식을 지칭하는 단어로 두루 쓰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래 전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작품들은 다양한 의도와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내용과 본질은 점차 희석되고 우리에게는 ‘표면이 고르지 못한 진주와 같이 섬뜩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양식’과 같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내용과 의도는 가변적이다. 마냥 조종당하기만 하는 관객은 되지 않기 위해서 양식이 지닌 의도를 알아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