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바늘
/정숙자
총알이 나를 뚫고 지나가네
내 몸에선 피 한 방울 나지 않네
어떤 멍울도 흉터도 없어 의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네
나는 훨씬 먼 곳에 와 있네
총알은 너무 먼 곳에서 날아왔기에 닳아 버린 것이라네
총알이란 예전엔 흉기였지만 이제 한갓 기호일 뿐이라네
얼마나 힘들어 조준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영 총알하고는 셈이 맞지 않는 속에 와 있네
이 총알이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도 없네
그렇지만 총알인 것만은 확실하네
옛날 옛날에 봤던 기억이 있네?
- 정숙자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中에서
이 시를 읽다보면 아방가르드의 색체가 짙게 채색되어 있는 느낌이다. 아울러 물체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분석하는 힘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총알이 나를 관통했어도 피한 방을 나지 않고 흉터가 없다니 이는 어쩌면 허무주의가 빚어낸 산물인 것이다. 총알이 너무 먼 곳에서 날아왔기 때문에 가는 바늘처럼 닳아 버려 느낌표 같은 기호로 변했다면 흉기는 아니지만 악마의 바늘이 되어 먼 옛날 상처 입은 기억을 반추하게 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정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