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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정약용(上)

 

수원화성을 기본설계한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갔을 때 만덕산(야생 차가 많아 다산으로도 부름)에 거처하면서 이를 호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여유당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주저하기는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조심한다.’는 뜻으로 ‘책롱사건(冊籠事件, 책을 넣는 농짝에 천주교 관련 물건 운반하다 발각된 사건)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정조보다 열 살 적은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한 달 후인 1762년 6월에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남인출신으로 하급관리였고 사도세자 사후 입지가 더 작아진 남인들은 정치를 떠나고자 한다. 정재원도 이때 귀농을 꿈꾸고 마침 태어난 정약용의 아명을 귀농(歸農)이라고 지었다. 다산은 23살(1785년)부터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성균관을 찾은 정조가 ‘중용(中庸)’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정약용 답안이 정조의 마음에 쏙 들어 극찬하고 그를 기억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이장할 때 한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넓은 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없던 시절이라 배를 서로 연결하여 그 위에 널판을 깔아 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조는 주교(舟橋, 배다리) 만드는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겼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수원신읍에 관공서들이 완성되자 1790년 6월 부사직 강유가 축성(築城)을 건의한다. 하지만 정조는 정치 및 민생 등을 고려하려 반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792년 겨울이 되면서 축성을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신읍이전 공사도 끝나 정치·경제적으로 안정기에 들어갔고 또 을묘년(1795) 혜경궁의 환갑을 수원에서 치르기로 정하면서 아들의 능력을 어머니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본다.

축성(築城)은 읍치를 만드는 일보다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 반대의견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하여 보다 정확한 계획이 필요했다. 이 축성계획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로 정약용을 선정하고 비밀리에 축성계획을 지시한다. 정약용은 계획을 규장각이 아닌 집에서 비공식적으로 진행한다. 중국 명나라 윤경(尹?)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成龍)의 성설(城說)을 참고하여 책을 만들고 이를 정조에 올린다. 이를 본 정조는 기뻐하고 추가로 공사시기에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돌 운반’에 관해 연구를 하게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철저히 실명화가 되어 공사에 참가한 각계각층 사람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관료들은 직책별로 총리대신 채제공부터 하급 포졸의 이름까지 있고, 의궤 편찬 관원과 이를 간인한 관원의 이름도 있다. 또 관리뿐 아니라 기술자인 석수, 목수, 미장, 와벽장, 대장장, 수레장, 화공, 가칠장 등등 분야별로 집계하여 약 1천800명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설계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니 설계자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임금이 설계자로 표현되어 있다. 축성계획이 공식화되기 전 정약용의 기본설계서가 완성되었고 설계변경이 되었지만 공사기준이 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기본계획서 ‘화성성역의궤’에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하여 임금이 친히 만든 것으로 되어있다. 정조실록, 일성록 및 성역의궤 등 공식기록에는 정약용이 화성설계에 관여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정조가 성곽설계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약용의 공로를 가로챈 것일까, 아니면 남인출신의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이도 아니면 실수로 누락된 것일까.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1792년 겨울 축성계획을 처음 할 당시 정조가 비밀리에 정약용을 불러 지시하여 만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수원화성의 기본설계자라고 알 수 있는 기록은 본인이 쓴 묘지명(墓誌銘)에서 나올 뿐이다. 이때는 정조가 죽고 의궤가 편찬된 지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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