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의 저자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원주민들의 종적을 좇아 이곳저곳을 떠도는 민족학자의 신세를 일컬어 ‘만성적인 고향상실증을 앓고 있는 심리적인 불구’라 비하했다. 세계대전을 전후로 그의 조국에서는 제3세계에 대한 동경과 로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었고, 여행책자와 엽서들은 그곳 나라들의 때타지 않은 원시림을 열렬히 찬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그러한 나라들에서는 서구인들이 꿈꾸는 원시와 낭만이 저물어버린 지 오래였다. 문명 이전의 진정한 고향을 찾아 멀고 먼 길을 떠나왔건만, 이미 그 고향은 산산이 파괴되어 버렸고 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또 다른 서구 세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민족학자는 더 깊은 산속으로, 오지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여행길의 끄트머리,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촌락까지 가봤자 번번이 좌절한다. 오롯한 그들의 문화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들의 오랜 문명은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대부분 굽어져 있었다.
유진 앙리 폴 고갱(1848∼1903)이 예술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 섬을 찾았던 것은 그보다 한 세기 전의 일이었다. 도시 생활에 신물이 난 그는 보다 근원적인 세계를 만나고자 갈망했고 타히티 섬으로 돌연 떠나가 버린다. 하지만 서구 탐험가들과 이주민들의 활약으로 이곳 역시 혼탁하게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타히티 섬의 변질된 모습에 실망한 그는 그렇게 공허한 가슴을 안고 파리와 남태평양을 수차례 오고가야 했다. 그 어느 곳도 화가에게 진정한 위안을 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고갱은 관객들로 하여금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 대한 막연한 향수와 동경을 갖게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순수의 세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려냈고, 이는 얼마간 화단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892년 작 ‘기쁨’이란 뜻의 ‘아레아레아’는 그중 하나다. 풀밭에 앉아 있는 두 여인들의 실루엣은 투박하지만 견고하고, 그들의 흙빛 피부 역시 그러하다. 또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색감들은 얼마나 독창적인지 흙빛과 원색이 잘 조합되어 있어서 흡사 도자기 위에 그려진 칠과 같이 느껴진다. 작가가 캔버스를 통해 완성한 세계는 곧 창조자가 흙으로 직접 빚은 도자기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타히티 섬이 고갱에게 안겨준 얼마간의 실망은 모두 감출 수 없었는지, 풀밭에 앉아 있는 여인의 훔쳐보는 시선과 쑥덕거리는 표정은 복잡한 심연의 도시인들과 조금은 닮아 보인다.
레비스트로스와 고갱의 공통점은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들 모두에게 떠돌이 인생이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것이다. 청년 레비스트로스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 철학, 법 전공을 거쳤지만 실증적인 자료가 부재한 논리 다툼에 허망함을 느끼고, 민족학자로서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고갱의 경우 보다 처절한 사연이 있었다. 언론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치적 자유를 찾아 가족들을 데리고 페루로 향했지만, 급작스러운 심장병으로 배 안에서 죽고 만다. 고갱과 그의 어머니는 페루에 정착했지만 가장 없는 삶은 고되기만 했고 결국 그들은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했다. 생존을 위해 긴 거리를 여행해야 했던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로서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후에 성년이 된 그는 증권회사 브로커로 일하며 잠시 유복한 생활을 누렸지만, 회사가 어려워지자 다시 가난으로 내몰렸다. 브로커로 잘 나가던 시절 그는 화가가 아닌 수집가로서 처음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다가 뒤늦게 그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막상 실직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림은 그의 손에 쥐어진 소중한 재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늦게 그림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화단의 인정을 받기까지 꽤나 마음고생을 해야 했고, 그는 남들이 하지 않은 무언가를 시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멀고 먼 남태평양의 섬으로 발길을 돌렸으리라. 하지만 그곳은 그가 꿈꾸던 순수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가 캔버스에 담은 세계는 그저 화가의 열망 속에서나 온전히 존재할법한 세계였다.
여행을 마치고 그는 작품들을 들고 파리의 동료들을 찾았다. 반짝 세간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화가로서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파리와 타히티 섬을 넘나들다가 생을 마감한다. 때론 여행이 예술가들에게 숙명으로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