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도 넘게 본 영화 ‘매트릭스’의 제작자 위쇼스키 형제는 남매로 바뀌었다. 이후 남동생은 형이 여성으로 변한 모습에서 내면과 외면이 일치된 편안함이 보였다고 말했다. 요즘 한국사회의 남녀관계는 성희롱 등으로 매우 불편하다. 노벨상 후보로 존경받아야 할 선배가 성희롱하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근저에는 남녀평등 지수가 낮다는 심리적 불안이 깔려있다. 여성의 접촉에 대한 불편한 표현을 여성적 내숭이나 예의로만 보고 넘기는 남자들이 많기는 하다.
반대로 친근함의 표현을 성희롱으로 보는 여성들도 보인다. 눈빛으로만 하는 성희롱에서 핵미사일 전쟁까지 모든 폭력의 시작은 자기 경험과 관점, 지식에 대한 믿음과 타인의 양심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성평등 지수가 낮을수록 여성도 남성도 서로 폭력적이 된다. 지난 칼럼에서 경고한 ‘제2차 한국전’이란 폭력의 시작도 자기 확신과 타인 의심이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를 존중도 않고 믿음도 없는 것이다. 필자는 미북의 전쟁이 종교적 전쟁으로 보인다. 서로 사탄이라 부르는 면이 있다.
트럼프와 절친한 목사는 하나님이 트럼프를 쓰신다고 표현하면서 ‘100% 북폭’을 설교한다. 김정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은 군인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 신도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더 폭력적인가만 남았다. 각자의 믿음 안에서만 서로를 바라보면 폭력은 필연적이 되고 창조적 혁신은 사라진다. 융합과 시너지는 최소한의 역지사지와 공통된 관점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미주리 대학에서 67개국 47만 명을 연구한 ‘국가별 남녀평등 지수와 여성의 이공계 진출의 정도’는 차별적 폭력의 시대에서 구별적 평등의 사회가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여성이 더 여성의 두뇌에 적합한 직업을 선호하면서 이공계에는 20% 정도 지망하고 나머지는 문과나 예술 등으로 지망하지만, 성평등 지수가 낮은 국가들에서는 여성들이 이공계에 40% 정도 지원하면서 문과 지망생이 줄어든다. 한국은 여성의 이공계 진출이 27%이니 성평등 전망은 희망적이라고 본다. 점점 각자의 본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할 희망 말이다.
안정적인 직장들에서 남자들을 선호한다면 여성들은 늘 느끼는 차별을 의식하면서 이공계 진출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많은 간호사나 영양사의 직업을 외면하려 한다. 일전에 남성 간호사와 여성 의사를 그린 삽화를 교과서에 의도적으로 그려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보았다. 그렇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효과는 있다고 느낀다. 이 조사에서 간과되는 측면은 아무리 성평등 지수가 높더라도 최소 15% 정도의 여성은 이공계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은 남성에게도 있을 것이라서 간호사나 영양사의 15% 정도가 남자가 된다면 그 사회는 성평등 지수가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젠더로 확장하면 여성의 15%는 남성적이고 남성의 15%는 여성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에 5% 정도의 트렌스젠더가 있는 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여교수의 성추행을 거부한 남학생의 성적 취향은 여교수의 성폭력을 들추는 공헌을 했다. 거의 모든 생태계에서 다양성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다양성이 거의 모든 생태계에서 필수적 조건이므로 다양성이 곧 생존의 조건이며 본성을 찾도록 돕는 행복의 조건이다.
학벌 차별과 청탁에 따른 신입사원 채용비리 등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자란 민주적 평등사회는 큰 상처를 받고 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은 본래 평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팔을 마음껏 360도로 돌리거나 밖으로도 꺾는 로봇들은 많다. 그렇게 인공지능(AI) 면접관은 직무적합성을 제대로 판단한다. 인간의 미래인문학에서 시험감독관이나 면접관은 사라질 것이다. 결국 AI시장, AI국회의원이 나오고 AI대통령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공정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온 세상 차별적 폭력 없는 구별적 평등을 즐길 것이다. 진정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시대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