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즉각적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폭력과 배설의 이상성애로 그득한, 그리고 오직 그것을 묘사하는데만 경주하는 이 악명 높은 포르노그래피가 ‘버닝’과 포개진다니. 영화의 서사만을 떠올린다면 그 접촉면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계층이 서로 다른 세 명의 등장인물,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이 한 데 모여 생기는 질투, 박탈감, 의심이 영화서사의 골격인 반면, 소설 ‘눈 이야기’는 명문가의 자녀들이 함께 성에 탐닉하며 금기를 해체하는 내용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서사와 별개로 ‘버닝’의 이미지는 ‘눈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서사와 이미지가 아무런 갈등 없이 결합하는 영화를 상찬한다. 그러나 서사가 삶의 표층을 견인할 때, 이미지는 삶의 표층과 심연의 불협화음을 왕왕 드러내니, 그 사이의 부정교합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요는 ‘버닝’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것은 ‘질투’나 ‘박탈감’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 ‘금기위반’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서사가 종수의 탈선에 주는 명분이 질투나 박탈감이라면, 금기위반은 그의 행동에 진정한 지반을 제공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수의 시선을 담은 카메라의 동선이 종종 무의미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선은 해미와의 정사에서 상대방에 거의 머물지 않은 채로, 빛을 머금은 벽을, 뒤이어 창문 너머로 날아간다. 해미가 반신 탈의한 상태로 춤을 출 때도 종수의 시점을 실은 카메라는 해미를 너머 공허한 하늘로 이동한다. 종수가 해미에 대한 연정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 도취된 것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카메라는 명백히 일러둔다. 종수가 도취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너머’이다. 성애를 너머, 다시 말해 일상의 공리 너머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종수는 텅 빈 곳을 응시하며 수음하며, 종국엔 불꽃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는 불을 찾으러 다니는 종수의 모습을 참 지난하게도 담고 또 담는다. 그의 집착이 화재를 막기 위함이 아니라, 불꽃을 만나기 위함이라는듯이. 그렇기에 그가 후에 불꽃을 직접 일으키는 건 예견된 일이다.
‘눈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성적만족을 위해 금기를 월경하는 것처럼 ‘버닝’의 종수 역시 금지된 불놀이에 도착된 청춘의 표상이다. 이러한 청춘들의 대표문화가 다름 아닌 인터넷 트롤링일 것이다. 인터넷 트롤러들의 주요 공격대상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일종의 성역들이며, 트롤러들은 진지한 확신범의 태도라기보다는 놀이의 양식을 견지한 채로 이들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이처럼 일상의 도덕과 통념을 태워버리려는 그들의 태도에는 특정한 목적도, 일관성도 없는듯하다. 그저 그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며, 오직 그 너머를 상상하려는 욕망만 있다. 이것이 ‘눈 이야기’의 남녀주인공이 벌이는 귀축의 축제, ‘버닝’의 종수가 도취된 불놀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종수가 소수의 일탈자들을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수를 닮았다는 점에서 ‘버닝’의 시사성이 있다. 인터넷 트롤링은 소위 ‘일베’라고 불리던 남성 넷우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의 이름만큼이나 진보의 이름으로, 여성혐오의 이름만큼이나 남성혐오의 이름으로도 불러내지는 다수의 문화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놀이를 진지하게 사유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의 가설은 그 배경에 지독한 권태가 있다는 것이다. ‘버닝’에서 불놀이에 빠진 이에는 무산계급인 종수뿐만 아니라, 유산계급인 벤도 있다. 단순히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의 2030은 국가주의에도, 민주화의 열망에도, 그것도 아니라면 개인의 노력에 따른 입신양명에 조차 회의한다. 거대담론이 사라진 지금, 어떤 정치적 기획이 청춘의 권태를 날려버릴 것인가. 그전에, 우리는 이 방화범들에게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까. 불꽃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