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북·미 정상들의 만남은 전세계를 긴장과 호기심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합의문을 접하고는 의외로 내용이 단순하고 간략하여 실망감이 생겼다. 합의문 4개의 항목에서 서두의 두 항목은 의례적인 평화약속의 내용인데 사실상 3항과 4항이 합의문의 골자로 볼 수 있다. 3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에 관한 내용이며 지극히 당연한 핵심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항목인 4항에 필자의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미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이미 확인된 전쟁포로 유골의 즉각적인 송환을 포함해 전쟁포로와 실종자의 유해 복구를 약속한다” 한국전쟁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양국이 쓰는 상호합의문에서 핵 포기와 유해송환 요구가 그 골자였던 것이다.
강하고 굳건한 국가의 전제는 전체 국민 성원들이 국가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애국심을 잃지 않도록 국민을 향한 약속이행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그 중에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목숨 잃은 자들의 보상과 예우를 통해 애국할만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짧은 북미합의문에 ‘비핵화 이행’과 같은 비중으로 전쟁포로와 실종자 유골송환 요구는 미국의 의중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는 순국 5분 전에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손수 만든 하얀 수의를 입고 찍었다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직도 찾지 못한 그의 유해를 생각한다. 자신의 유해가 하얼빈 공원에 묻힌 뒤 언젠가 해방이 되면 고국 땅에 묻히길 원했고 천국에 가서도 독립 소식에 춤추며 만세 부르리라고 남긴 그의 유언. 그러한 바람이 있었건만, 처형 후 뤼순 감옥으로 찾아간 두 남동생의 요구에도 일본은 거듭된 변명으로 유해 공개를 거부했고 매장 장소도 비밀로 했다.
이후 김구 선생이 유골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암살되어 중지되었고, 북한에서도 70년대와 80년대에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파견했지만 찾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2008년 남북공동발굴단을 통해서, 또 한·중·일 공동유해발굴단 구성 추진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제는 뤼순 지역일대의 개발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희망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진다.
비록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해방된 고국 땅에 모셔올 수는 없으나 지금 우리 모두에겐 ‘안중근 정신’이 필요한 때를 맞이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이는 에도 메이지 시대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일본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판문점선언에 연이은 북·미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걸어가게 될 동북아의 세력균형 조정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지침서가 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남북한이 공통으로 지향할 수 있는 영웅이며 중국 역시 역사속 안중근의 비중을 저버릴 수 없다. 더구나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의 정신과 인품에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는 구리하라 형무소장은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일을 연기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까지 했다. 또 처음엔 혐오감으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간수 치바 도시치는 사형집행일 그가 남기고 떠난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의 유묵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 20년간 매일같이 그를 추모했을 정도다.
이제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으로 동북아 평화의 화신으로 그의 정신을 다시 불러오자.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의 갈등과 반목의 상징인 철조망을 걷어내고 수없이 뿌려둔 지뢰들도 제거하여 그곳에 가장 먼저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피에타(pieta)’를 건립하자. 세상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으로 조마리아 여사를 DMZ에 세계평화의 화신으로 우뚝 세우자.
아들의 죽음을 안고 슬퍼하는 미켈란젤로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와는 달리 100년도 훨씬 넘어 상봉하는 두 모자의 모습이 기쁨과 환희의 장면으로 거듭 탄생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