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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콘크리트 장안문

 

수원화성은 다른 지역의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시기 많은 훼손이 있었고 1950년대에는 전후복구로 관리를 못 하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수리가 시작된다. 마침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수교를 맺고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분야의 문화도 받아들이는데 문화재 분야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기부터 오사카성과 나고야성 등 문화재를 복원할 때, 재료는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단청은 단순한 달걀색(미색)으로 하였다. 이런 영향을 받은 군사정부도 문화재 복원에 이처럼 하였다.

광화문 복원공사를 시작할 즈음 목조로 할 것인지 아니면 콘크리트로 할 것인지 놓고 논의가 있었다. 복원예산에 있어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목조로 복원할 경우 7천만 원, 서울시 도시계획국은 콘크리트로 복원하는데 1억 2천만 원을 예상했다. 5천만 원이 더 소요된 이유는 곡선이 많은 한옥의 공포 부재를 콘크리트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경비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1968년 광화문 복원은 서울시의 의견에 따라 콘크리트로 진행됐다.

이후 콘크리트는 문화재 현장에서 주재료로 활용되었는데 이는 콘크리트가 목재보다 훨씬 강하고 내구성도 뛰어나 구조적 시한이 영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조건축은 보통 60년을 구조시한으로 하여 전체를 해체해서 낡은 부재는 교체하여 다시 조립한다. 몇백 년 된 목조건축물은 이런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정서상 콘크리트 한옥은 환영받지 못했고, 문화재의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했다. 나무는 불에도 타고 물에도 취약해서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지만, 콘크리트는 세월의 흔적이 쌓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강아지를 키우다 때마다 보살펴야 하지만 강아지 인형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마 목조의 한옥과 콘크리트 한옥의 차이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광화문은 시간이 지나자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마침내 2006년 원형을 되찾기 위해 비싸게 지은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된다. 여러 조사연구를 통해 원위치를 찾고 구조와 형식에서도 원형을 찾았으며 3년 8개월의 복원공사를 통해 2010년 광복절에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등재를 위해 1997년 프랑스를 방문한 심재덕 당시 수원시장의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 되고 있다. 만약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이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면 등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안문이 콘크리트로 복원될 된 뻔한 일이 있었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반파되고 이후 관리 부족으로 완전 소실 됐다. 1960년 중반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안정화가 이뤄지자 장안문 복원설계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건 부족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1971년이 되어 경기도청 주관으로 복원이 재추진된다. 장안문 복원설계도는 이미 몇 년 전에 완성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경기도청에서는 당연히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자 이 복원설계를 재사용하고자 문화재관리국에 도서를 요청했다.

공문을 받은 문화재관리국의 책임자인 국장 허○(許○, 1924~?)은 결재과정에서 “콘크리트 구조로 설계를 다시 하고, (기왕) 목조설계 용역비를 공제토록 하는 전제에서 설계자와 용역계약을 체결토록 하라”고 지시한다. 이 내용은 경기도청 공문(문공, 1030-82. 1971년 1월 27일, 국가기록원 소장)에 나와 있다.

당시 복원설계는 국보기술단에서 수행했는데, 대표 강봉진은 건축사로서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복원하는 데에 아쉬움이 있었는지 몇 달 후 대한건축학회지(1971-07)에 ‘수원성곽 장안문 실측보고’라는 일종의 항의성 글을 싣는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이 부족해서인지 복원공사는 연기됐고 다행히 1795년 ‘수원성 복원정화사업’으로 장안문은 목조로 복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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