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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가짜로 몰면서 일본서기 추종하는 사람들

371년 근초고왕이 고국원왕 전사시켰다는 ‘삼국사기’
백제가 야마토왜에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는 ‘일본서기’

중국 사료 ‘위서’ ‘북사’ 등 고국원왕 전사사실 기록
그럼에도 불구 뼛속까지 각인된 ‘삼국사기 불신론’
일본서기를 믿자는 식민사학자와 언론 카르텔 굳건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4>
임나일본부설은 극복되었나 ③


한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두 기록


여기 두 역사서가 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다. 그런데 같은 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말하는 두 역사서의 내용이 아주 다르다. 서기 371년의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삼국사기’는 백제 근초고왕이 재위 26년(371) 겨울 태자 근구수와 함께 정예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2년 전인 369년에 근초고왕은 고구려 2만 군사를 격퇴한 후 직접 황제의 깃발인 황색깃발을 사용하면서 군사들을 대대적으로 사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연 중흥군주였다.


‘일본서기’는 371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일본서기’는 이해 백제왕이 구저를 보내 야마토왜의 신공(神功)왕후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말하고 있다. 또 왜의 신공왕후가 치쿠마 나가히코(千熊長彦) 등을 사신으로 백제에 보내자 백제왕 부자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면서, “귀국(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처럼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겠습니까? 성스러운 임금(신공)께서 위에 계셔서 해와 달처럼 밝으시고, 지금 신(근초고왕)은 아래에서 산악처럼 굳세게 서쪽 울타리가 되어서 두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일본서기’)”라고 충성을 맹세했다고 말하고 있다. 371년에 백제는 야마토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위서’·‘북사’에도 고국원왕 전사사실 나와


371년의 사건을 기록한 ‘삼국사기’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 중 하나는 거짓이다. 무엇이 거짓일까? 두 목격자의 증언이 다를 경우 다른 목격자의 증언이 중요하다. 371년에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사건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뿐만 아니라 ‘고구려본기’에도 나온다. ‘고구려본기’는 고국원왕이 군사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10월 23일에 사망했다고 말한다. ‘삼국사기’는 보통 달까지만 쓰고 날짜는 쓰지 않는데 이 사건은 예외적으로 날짜까지 적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목격자는 또 있다.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의 정사 ‘위서’인데, 그 ‘고구려열전’에서 “…쇠(釗:고국원왕)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했다”라고 쓰고 있고, 같은 책 ‘백제열전’도 “(백제에서)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북사(北史)’ 사이(四夷)열전 고구려조에도 “쇠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위서’·‘북사’ 등의 중국 사료도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근초고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사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절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는 혼자만의 주장이다.


두 목격자의 증언이 다를 경우 전후 상황도 중요하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 이후 같은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어 사생결단하고 싸우는데 결국 백제 개로왕(455~475)의 전사로 이어진다. ‘일본서기’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신라·가야가 조공을 바쳤다는 뜬금없는 기사가 계속 이어진다. 아직 국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야마토왜에 신라·고구려·백제·가야가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 자체가 조작된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일본서기’로 돌아가자는 망국적 주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극우파들과 남한 강단사학은 ‘일본서기’는 사실이고 ‘삼국사기’는 조작이라고 거꾸로 말한다. 와세다대 출신의 인제대 교수 이영식은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현대적 국가의식을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일본서기’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객관적인 사료비판을 통해 관련 기술을 다시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선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도 필요하다(강만길 외 지음, ‘우리역사를 의심 한다’)”

 

객관적 사료비판도 생략하고 무조건 ‘일본서기’를 믿자는 말이다. 이영식의 말대로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보면 신라·고구려·백제·가야는 모두 야마토왜의 속국이 된다. ‘일본서기’는 응신(應神) 7년(396) 9월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말하고 있다. 이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영락(永樂) 6년인데, 광개토대왕비문은 이해 광개토대왕이 백제 정벌에 나서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개선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광개토대왕이 백제·임나·신라와 함께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책은 거짓이거나 일본 열도 내 신라·고구려·백제·가야의 분국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썼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극우파들은 이런 ‘일본서기’를 유일한 근거로 369년부터 562년까지 야마토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이 남한 강단사학계를 지배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특별전인 ‘가야본성’ 연표에 ‘369년에 백제·왜 연합군이 가야를 공격’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369년에 백제와 왜가 연합군을 결성한 사실이나 이들이 가야를 공격한 사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야사람들은 국호를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관 속에 들어갔어야 할 식민사학이 지금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는 언론 카르텔을 비롯한 각종 카르텔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노형석 기자는 2019년 12월 8일자 기사에서 ‘가야본성’ 전시에서 가야가 1세기 때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흙방울 토기와 파사석탑을 전시한 것을 크게 비판했다. 이 기사에서 노형석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가야를 4~6세기 고대 한반도 남부 옛 변한 지역에서 연맹체 국가로 번성했던 대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등의 6가야로 이해하곤 한다. 일본극우파 역사관을 추종하는 일부 학자·기자들 외에 누가 가야의 존속시기를 1~6세기가 아니라 4~6세기로 인식하는지 궁금하다.”


노형석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면서 “‘가야’라는 말은 고려 초에야 등장했고, 가야 시대 사람들은 이런 국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 그것이다”고 주장했다. 가야 사람들은 가야라는 국호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새로운 학설이다.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21년(서기 77)조는 “아찬 길문이 가야군사와 황산진 어귀에서 싸워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8년(서기 87년)조에도 “신라의 서쪽에는 백제가 있고 남쪽에는 가야가 접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 ‘가야’라는 국명은 아주 많이 나온다. 신라 파사 이사금 15년(서기 94)에 마두성에서 가야를 격퇴한 기사, 같은 왕 17년(서기 96) 가야가 남쪽 변경을 습격한 기사, 같은 왕 27년(106) 마두성주가 가야를 정벌한 기사, 지마 이사금 4년(115) 2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한 기사 등 수많은 ‘가야’가 나온다. 그런데 노형석은 가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호가 가야인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거짓말까지 등장한 가야사


노형석은 가야사람들이 ‘가야’라는 국호 자체를 몰랐다는 근거로 두 사료를 들었다. “‘일본서기’, ‘삼국지위지동이전’ 등의 고대 사서에는 한반도 남부 영남권 지역에서 주로 공존하고, 경쟁하며 이합집산한 10여개국부터 20여개국까지의 소국들이 거명된다. ‘임나’ ‘가락’ ‘가라’ ‘안라’ 같은 이 소국 이름들이 바로 당대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불렀던 말이다.” 노형석은 ‘일본서기’와 ‘삼국지’에 ‘한반도 남부 영남권’이란 지역이 나오고 가야라는 국명은 안 나오는 대신 ‘임나·가락·가라·안라’ 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삼국지’에 ‘한반도’나 ‘영남’ 등의 지명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남들이 쓴 ‘일본서기’와 ‘삼국지’는 믿을 수 있어도 우리 선조들이 쓴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믿을 수 없다는 발상이 놀랍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삼국사기·삼국유사 불신론’이 뼛속 깊게 각인된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정작 ‘임나·가락·가라·안라’라는 국명이 나오지 않는다. 자국사에 무지한 독자들이 어찌 ‘삼국지’ 원문을 찾아보겠느냐는 심보로 독자들을 속인 것이다. ‘일본서기’에만 ‘임나·가락·가라·안라’ 등이 나오는데,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내세우기면 속내가 너무 드러나니까 ‘삼국지’에도 그런 이름들이 나오는 것처럼 거짓말시킨 것이다.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학교수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자고 주장하고, 신문기자가 거짓말까지 시켜가면서 ‘일본서기’를 추종하는 현실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과 언론의 이런 카르텔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런 망국적 카르텔 해체는 보수, 진보를 넘어 이 나라가 계속 존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글=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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