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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의 시시비비]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은 스포츠계의 폭력문화를 소박하지만 깊이 파고든 작품이다. 두드려 맞으면서 악몽의 수영 선수생활을 한 코치 광수는 초등학생 준호를 가르치면서 똑같이 폭력수단을 동원한다. 아이가 코치에게 매를 맞는 줄 알면서도 엄마가 그것을 당연시하는 장면은 우리 주변에 흔한 극성 엄마의 모습이다.


영화 ‘4등’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매를 맞아야 하는 연습을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기까지 한 준호가 동생 기호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다. 폭력은 그렇듯 소리 없이 대물림된다. 매번 4등밖에 못하던 준호가 광수의 혹독한 훈련으로 2등을 하자 엄마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준호는 엄마에게 묻는다. “내가 매 맞아도 1등 하는 게 좋아?” 이 질문 한마디에 ‘엘리트 체육’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감염된 대한민국 스포츠의 병폐가 다 들어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스포츠 선진국’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아니다’다. 선진적인 ‘사회 체육’ 정책으로 온 국민이 행복해야 할 21세기에 우리는 결코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수식어를 달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후진국형, 독재 국가형 스포츠 정책을 하고 있다. 온 국민이 스포츠 애국주의의 포로다. ‘엘리트 체육’은 구시대적 군사문화의 잔재다.


우리의 프로 스포츠가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국민저항을 잠재우려고 펼친 우민화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전두환 정권은 3S(Sex, Screen, Sports) 우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구사했다. 1981년 12월 프로야구에 이어, 1983년 프로축구 시대를 열었다. 프로 시대의 개막은 우리의 ‘엘리트 스포츠’가 더욱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스포츠를 ‘로또’처럼 여기는 국민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엘리트 체육’은 소질 있는 아이들만 따로 뽑아서 공부는 안 시키고 패고 까면서 최고의 선수로 키우는 방식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수업에 제대로 들어오는 학생선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군사문화는 ‘결과 지상주의’다. 군대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스포츠계는 ‘성과 지상주의’ 노예들의 감옥이다.


얼마 전 기준으로 미국의 고등학교 야구팀은 1만5천632개에 선수는 47만4천791명이고, 일본의 고등학교 야구팀은 4천48개이고 선수는 16만7천88명이다. 한국의 고등학교 야구팀은 고작 57개에다가 선수는 1천867명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 야구팀의 경기력은 미국이나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이게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위정자들이고 국민이다. 망국적 엘리트 스포츠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기 때문이다.


경주체육회 소속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국가대표 출신의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최 선수가 죽기 전 요로에 피해사실을 신고했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뒷얘기에는 가슴이 아프다. 가해 주범으로 지목된 가짜 팀닥터는 종적을 감췄고, 제2 제3 선수들의 눈앞 피해증언에도 감독과 선배선수들은 오리발만 내민다.


사건 조사에 나선 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의 언행은 더 심각하다. 유명 핸드볼 선수 출신인 임 의원의 말은 사뭇 체육계와 소속 정당에 돌아올 피해를 더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다. ‘엘리트 체육’, ‘성과 지상주의’에 의식을 묶어놓은 채 천박한 진영논리에까지 물든 모습이 씁쓸하다. 지금이야말로 구시대적 ‘엘리트 체육’ 정책을 해체할 때라고 용기 있게 주장할 수는 없는가. 이쯤에서 다수 국민이 함께 즐기는 진짜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자고 외칠 수는 왜 없나.


단언하거니와, 우리의 체육 정책이 선진적인 ‘국민 체육’, ‘사회 체육’ 정책으로 혁신되지 않는 한 이 나라 모든 스포츠팀 안의 절대 갑질과 폭력문화는 개선되지 않는다. ‘엘리트 스포츠’의 협곡 안에 갇혀 육체적·정신적으로 죽어가는 아이들도 줄어들 수가 없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그것밖에 없으니 한 발짝만 벗어나도 끝장날 것 같은 절박감에 까이고 터져도 참아야만 하는 무구한 아이들을 이젠 구출하자. 세상이 얼마나 넓고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를 전혀 모르는 딱한 아이들의 인생을 긍휼히 여기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제발 이쯤에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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