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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예학의 대가, 김장생 선생의 돈암서원 (5)

  • 황금희
  • 등록 2020.07.24 06:39:31
  • 인천 1면

 

지금의 돈암서원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 외에도 아들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도 함께 모셔져 있다.

 

김집은 김장생의 둘째 아들로 선조7년에 태어나 효종7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아버지와 함께 예학의 기본체계를 완성한 인물로 송시열의 스승이기도 하다. 송시열은 김집과는 33년의 나이차가 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김장생에게 예학을 배웠으나 김장생이 죽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마쳤다. 송준길은 이이와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김집의 천거로 효종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돈암서원에 배향된 네 분은 예학 이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학자로서는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돈암서원은 네 분 선정(先正) 신(臣)을 모신 선정서원이기도 하다.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들을 논산 돈암서원에서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 네 분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 돈암서원의 제향공간인 숭례사이다. 숭례사는 양성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돈암서원에서는 가장 높은 영역이다. 숭례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삼문을 통과해야 한다.

 

3단의 기단 위에 자리한 내삼문은 아주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통의 내삼문은 3칸의 문이 서로 붙어있는데, 이곳은 칸 사이에 각각 담장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담장에는 기왓장으로 멋지게 장식을 했는데, 전서체의 글자문양도 꾸며 넣었다. 사당 건물치고는 꽤나 화려하다. 내삼문 가운데 어칸 오른쪽에는 ‘박문(博文)’, 왼쪽에는 ‘약례(約禮)’가 새겨져 있다.

 

이 문자 문양은 내삼문 좌우로 연결된 담장에도 이어진다. 동쪽의 담장에는 ‘지부해함(地負海涵)’, 담장 서쪽에는 ‘서일화풍(瑞日和風)’이 새겨져 있다. 지부해함은 ‘큰 땅과 깊은 바다처럼 지식의 넓고 깊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서일화풍은 ‘좋은 날, 상서로운 구름, 온화한 바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하라’는 의미다. 박문약례는 ‘지식은 넓게 하되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뜻이다. 모두 김장생 선생과 그의 후손들이 학문적 사상을 보여주는 글자들이다.

 

내삼문을 지나면 숭례사 마당으로 들어선다. 경사진 곳을 단장해 사당을 앉히고 주변 전체를 담장으로 둘러쌓았다. 경사진 곳이라 위로 올라갈수록 내려다보이는 서원전경이 강학공간에서 서원을 바라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해 사당건물과 어우러져 한층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4층의 기단석 위에 자리한 숭례사는 그리 높지 않은 사당 위치에도 불구하고 우러러 보인다. 맞배지붕에 풍판을 단 숭례사는 전면 한 칸은 툇간으로 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올릴 음식들을 마련하는 곳은 전사청이다. 돈암서원의 전사청은 양성당과 숭례사 사이 우측으로 자리해 있다. ‘ㄱ’자 형태의 전사청은 평소 개방되는 곳은 아니다.

 

숭례사와 전사청을 뒤로 하고 다시 양성당 앞으로 옮겨보자. 양성당 앞에는 좌우로 동재와 서재인 ‘거경재’와 ‘정의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돈암서원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거경재와 정의재는 응도당의 내부 실의 이름을 따와 이름이 동일하다. 동재의 마루에 걸터 앉아본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 때문인지 앉은 자리가 편안하다.

 

긴 시간 앉아 있다 보니 입덕문으로 들어와 서원을 둘러보고 나가는 단체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른 아침 단체가 빠져나간 돈암서원은 한 층 더 적막하다. 단체로 다녀간 사람들이 김장생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던 유생들이었다면 그 때의 이 돈암서원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예학을 배우던 서원답게 유생들은 늘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했을까? 아니면 왁자지껄한 순간도 있었을까?

 

고요함과 왁자지껄함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항상 공존해 있는 듯 하다. 돈암서원에서 그 공존하는 시간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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