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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1

 

다섯 번째로 여행할 서원은 소수서원이다. 영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라는 브랜드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영주의 ‘선비’는 어떤 선비들일까? 소수서원 여행을 통해 생각해보자.

 

소수서원은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해 있다. 순흥면은 한 때 ‘역모의 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는 세조의 아우이자,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던 금성대군이 순흥면으로 유배되어 오면서 시작된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이를 지지할 수 없었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편에서 모반을 꾀하다 유배당하는 신세가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다 순흥면으로 오게 된 것은 세조 2년(1456)으로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면서였다.

 

순흥면에 위리안치 된 금성대군은 1457년 당시 순흥부 부사였던 이보흠과 다시 한 번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게 되었고,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많은 선비들과 지역 백성들도 함께 희생되었다. 이 때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를 흘러 동촌1리까지 와서야 멈추었다. 그래서 동촌1리는 지금도 피끝마을이라 불린다.

 

순흥도호부였을만큼 컸던 순흥은 단종 복위운동 실패 후 혁파되었다. 순흥면은 영천, 풍기, 봉화 등으로 나뉘어 통폐합되었다. 순흥면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안향의 고향이다. 안향은 중국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연구와 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안향의 뒤를 이어 안축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순흥면을 성리학의 메카로 자리 잡게 했고 이는 영주 출신 정도전에게도 이어졌다. 따라서 영주는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본산인 셈이다.

 

소수서원은 금성대군이 순흥 사람들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던 숙수사 터에 세워졌다. 숙수사는 당시 불에 태워져 없어졌고, 약 9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중종38년(1543년)에 서원이 들어섰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부임해 옛 숙수사터를 보고 중국 여산의 백록동 서원을 떠올린다. ‘구름에 둘러싸인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등 주변 풍광이 그에게 인상 깊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운동’이라는 이름을 지어 서원을 건립하였다.

 

주세붕은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을 배향하는 사묘를 짓고, 강학을 위한 서원을 건립하였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웠던 때는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했던 시기였다. 또한 안향은 풍기향교에서 이미 배향을 하고 있어서 서원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주세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서원을 완성하였다.

 

기근이 들어 어려운 와중에도 주세붕이 서원을 건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관련기록을 수집해 엮은 ‘죽계지(竹溪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사람에게 가르침이 없다면,...(중략) 인류가 멸망한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중략)..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즉, 주세붕은 서원을 세운 이유를 ‘교육’에 두고 있었다. 백운동 서원의 교육은 모두 ‘관리양성’을 위한 과거준비에 맞춰 있었다. 백운동서원의 공부 방법 중 하나가 ‘거접’이었다. 거접은 ‘3개월 정도 합숙하면서 과거시험을 위한 글짓기 연습을 집중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성균관, 향교, 서당 등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행하고 있는 시험 준비 방법이었다. 마치 오늘날 기숙학원에서 논술 준비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백운동 서원의 거접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서원이 설립되고 3년 정도가 지나자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되지 않아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라는 말이 회자 될 정도였고, 백운동 서원은 과거 공부의 명소로 이름을 떨쳤다.

 

주세붕은 왜 ‘과거급제’에 목표를 두었을까. 그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원의 거접’에 비판적인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백운동서원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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