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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동칼럼] 책 읽는 소리에 가을이 익는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여름이 주인 행세를 하더니만 추석이 지나자 가을이 제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산천초목에 산고(産苦)의 결실이 저마다 색깔을 드러낸다. 그게 순리다.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 가을은 소리의 계절이다. 논밭에 벼 여무는 소리, 수수더미 영그는 소리, 풀벌레 소리 등이 한창이다. 이들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소리 못지않게 사람들이 책 읽는 소리가 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달빛과 꽃 색깔이 아무리 좋아도 가족들의 화목한 얼굴빛만 못하고, 가야금과 거문고 켜는 소리, 바둑장기 두는 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자손들이 책 읽는 소리만 못하다”는 글귀가 있다. 그렇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바다를 항해해도 활자매체를 통한 책읽기만큼 좋은 게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대면, 비접촉 시대에도 활자로 된 책읽기는 여전히 정겹다. 책의 숲에는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구슬이 너무나 많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지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달려온 삶들이 아닌가.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이 왔다. 현재를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책읽기도 빠트릴 수 없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예전의 독서는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서당에서 낭랑하게 목청을 돋우고 가락에 맞추어 책을 읽었다. 이젠 드라마에서나 보는 풍광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요즘도 서재에서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버릇을 이어가고 있다. 책 읽는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스며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외워진다.

 

중세 유럽에서도 책은 반드시 소리를 내서 읽었다고 한다. 눈으로만 읽는 묵독(黙讀)은 그 비밀스러움 때문에 요사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신성한 경전을 읽을 때 문장의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고 성스러운 단어를 읽어야 책장에 쓰인 ‘죽어 있던 낱말’들이 훨훨 날아올라 의미화 된다고 여긴 듯하다.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법은 동서고금이 같았던가 보다.

 

요즈음 책 읽는 소리가 뚝 그쳤다.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책읽기가 낯선 손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준비가 필요하고 신경이 쓰이는 버거운 대상이 된 것이다. 힘든 삶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소리 내어 읽어보자. 책 읽는 소리가 정겨운 이 가을에 소리 내어 읽으면서 상쾌한 리듬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리를 통해 기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성독(聲讀)일 때 더욱 더 그렇다. 미래가 불확실하다. 코로나19 팬데믹에 팍팍한 세상을 건너가다가 만나는 짧은 순간들로 인하여 우리네 삶이 새로운 원기로 충만해 지길 바란다. 어린자녀들의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다. 이 위기 또한 지나가리라.

 

‘글을 읽는 것이 곧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라고 가르쳤던 우리 민족이 아닌가.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무수한 책들을 큰소리로 읽는 훈련이 생활화될 수 있었던 게 우리 가족문화였다. 활자화된 문자언어는 음성언어로 나타나야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감(五感)외에 서로의 감각이 어울려서 느껴지는 공감적 심상이 떠오른다. 책의 숲에서 맛있는 열매를 만나 한 입 베어 물고 향기에 취하는 가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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