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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편(便)

 

 

자주 듣는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 편인가. 혹은 답하고 혹은 침묵한다. 간혹 편이 없다고 애써 손사래 치는 사람도 있다. 왜 없는지, 없을 수밖에 없는지, 없어야 마땅한지, 글을 써서 입증하려고도 한다. 그럴 때, 그러니까 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편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하는 것이 ‘인용(引用)’이다.

 

인용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을 빌어 나의 생각과 주장의 타당성을 밝히는 손쉬운 방법이다. 그런 만큼 인용에 동원되는 사람과 책과 말과 글귀 또한 다양하다. 철학과 사상, 과학과 예술, 심지어 신화와 종교까지 인용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 인용의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끌고 와서 내 것으로 꾸미는 것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습관처럼, 무언가를 인용하는 사람의 글에는 눈길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손쉽게 빌려온 말이나 글에는 생각이 뿌리내릴 틈이 없다. 틈이 없는데 어느 깊이에 공감이 고이겠는가. 공자와 예수와 싯다르타의 말과 글을 날마다 노래한다고 공자와 예수와 싯다르타가 되진 않는다. 백 마디의 인용보다 솔직한 생각 하나에 눈길이 머묾도 그래서다.

 

편이 없는 사람은 없다. 없다고 하는 순간 새롭게 편이 갈린다. 있거나 혹은 없거나. 대다수 경우에는 드러내기 싫어 없다고 할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드러냄으로 인해 받게 될 눈총이 따가운 세상이니까. 그렇다고 ‘중도’라고 우기지는 말자. 편이 없을 수 없듯이 중도 또한 없다. 어떠한 정책이나 이슈에 따라 이쪽 편이었다가 저쪽 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선택이 모호해서 유보할 순 있다. 그럼에도 ‘이도저도 다 싫다’라며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중도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이도저도 다 싫은 사람들끼리 뭉친 또 다른 편이다. 이쪽 편도 싫고 저쪽 편도 싫거나, 이쪽 편에 끼기도 부담스럽고 저쪽 편에 서기도 눈치 보이는 사람들의 변명이다. 다시 말하지만, 편이 없는 사람은 없고 중도라는 것의 실체 또한 없다.

 

형편에 따라 갈리는 게 편이다. 그렇다고 처지나 형편이 편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노동자만 해도 그렇다. 똑같은 형편의 노동자여도,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편도 있고 촛불 집회에 참여하는 편도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태극기 집회에 가지 않는다. 밤새워 촛불을 밝히는 사업체 대표들도 있다.

 

결국 편이 갈리는 것은 형편이기보다 믿음이다.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대한 믿음이 편을 가른다. 옳고 그름, 전쟁과 평화, 사적 가치와 공공의 가치 등에 대한 선택과 믿음이 편을 나누는 기준이다. 다만 그 기준에도 우선순위가 있음을 잊지 말자. 같이 촛불을 들었다고 해서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순위까지 모두 똑같을 순 없다.

 

평등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함께 지향하지만, 누군가는 평등을, 누군가는 정의를, 누군가는 평화를, 누군가는 생명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 있다. 우선순위에 둔 가치가 다르다고 다시 편을 갈라 싸우진 말자. 편(便)은 강물과 같아서, 나뉠수록 요란하고 합칠수록 고요하다. 잘 알지 않는가. 바다에 이르는 강물은 지극히 고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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