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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나이

 

새해가 금세 한 달이나 지났다. 이승의 시간은 이렇게 고속으로 줄어든다. 내가 열여섯 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상경하던 장면이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한데, 어언 45년 전이다. 


공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學).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를 확고하게 세웠다(而立). 마흔 살에는 세상의 어떤 풍파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不惑). 다시 십 년 후,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知天命). 환갑의 나이에 이르자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다 들렸으며, 불필요한 잡음들은 걸러져 들어왔다(耳順). 칠순이 되니 마침내 어떤 일을 마음 가는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 그리고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초에 매스미디어나 소셜미디어에서 나이와 관련된 한자 표현들을 자주 접한다. "이제 불혹이다",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내 나이 벌써 이순이라니..." 등의 문장들이다. 이런 글들을 대할 때마다 좀 불편하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공자 자신의 인격성장 단계를 나이와 연관지어 고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학'이나 '이립'은 범부들도 가능한 경우겠지만,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등은 필부들이 그 나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공자에게나 가능한 높이였을 것이다. 


이 언어관습은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공자가 십년 단위로 바꾸어 부른 철학개념들과 나이의 숫자를 동일시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가장 심하다고 한다. 어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뜻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속성이 있다. 바로잡기 힘든 걸 모르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마흔이 아니라 일흔에도 '불혹'의 경지로 사는 건 쉽지 않다. '지천명'의 天命이 중용1장에 나오는 그 '천명'이라면 이제 오십이 된 중년의 사내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참칭(僭稱)이다. '이순'이나 '종심'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공자만이 도달한 수준인 것이다. 

 

나는 예순이 넘었으나, 여전히 세상잡사에 미혹되어 횡보한다. 천명은 커녕 든든하지 못한 쌀독의 공허가 언제 끝날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시대 민초들 모두의 수준이며 공동운명이다. 귀는 조금도 순하지 못하다. 오히려 야단법석의 집결지다. 

 

갑남을녀들은 칠순을 넘어 팔십이 되더라도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 각각이 실로 초인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가치들을 품격 있는 삶의 목표로 정해놓고, 일상에서 소박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온당하고 마땅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어느 날 높이 존엄하고, 깊이 질적인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그 소수에게만 진정으로 나이가 숫자를 넘어 격조를 갖게  되지 않을까.


공자는 바로 이걸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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