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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 툭

 

 

떨어졌다. 목숨 하나가 또 떨어졌다. 전옥주가 죽었다. 일흔한 살의 나이였다. 이것으로 전옥주는 완전히 죽었다. 완전한 죽음으로 세상에서 지워질 때까지, 전옥주는 수도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죽었다. 처음 전옥주가 죽은 것은 1980년 5월 광주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의 머리와 목과 가슴에 총구멍을 겨눌 때, 전옥주는 가두방송을 하며 계엄군의 학살에 맞섰다. 그것이 전옥주가 죽어야 할 이유였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그것이 죄의 전부였다. 죽어가는 형제자매를 살려달라고 가두방송을 한 죄로 전옥주는 죽어야 했다. 전두환이 이끄는 계엄군은 전옥주를 간첩으로 조작했다. 계엄사가 발표한 ‘모란꽃 간첩단사건’이 그것이었다. 보안대로 끌려간 전옥주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고문을 당하며 처음 죽었다.

 

보안대 군인들은, 몽둥이로 매타작을 하며 열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야구방망이에 맞아 팔이 부러졌고 척추가 내려앉았다. 화장실도 못 가게 해서, 가슴에 총구를 겨눈 체 잔디밭에 신문지를 깔고 용변을 봤다. 성고문도 자행되었다. 전옥주의 옷을 모두 벗긴 보안대 군인들은, 총 개머리판과 30cm 나무잣대로 음부를 짓이기고 쑤셔댔다.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하혈이 시작됐지만 성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서른한 살 여성, 전옥주는 그렇게 죽었다.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던 전옥주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로부터 전옥주는 다시 격리되었다. 손가락질과 멸시의 눈초리가 끝없이 전옥주를 따라다녔다. 성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밤마다 자살충동이 들끓었지만, 전옥주를 품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던 전옥주는 그렇게 우리사회로부터 생매장 당해 다시 죽었다.

 

성고문으로 죽고 사회로부터 매장당해 죽은 전옥주는, 해마다 5월만 되면 어김없이 또 죽었다. 총소리에 놀라 죽고, 군복에 소스라치다 죽고, 성고문의 수치심에 혀를 깨물다 죽었다. 그렇게 전옥주는 40여년을 계속 죽었다. 살았으되 계속 죽을 수밖에 없는 전옥주의 비극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청문회와 재판이 계속되었지만, 전옥주의 반복되는 죽음 앞에 죗값을 치룬 자는 아무도 없었다. 벌을 받기는커녕 골프를 치며 히죽거리기 바빴다.

 

전옥주가 죽었다. 지난 2월 16일, 수도 없이 죽어야 했던 전옥주가 마침내 완전히 죽었다. 완전히 죽은 전옥주는 어떤 심정으로 눈을 감았을까.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도 아랫배를 파고드는 수치심에 이마를 찌푸렸을까. 성고문을 하며 킬킬거리던 보안대 군인들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까. 피맺힌 한을 끝내 풀지 못한 전옥주는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전옥주가 죽었다. 죽어야 할 자는 살아있고 살아야 할 전옥주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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