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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나는 반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6세기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한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 명제로부터 21세기의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욕망충족의 소비형 인간 명제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는 수많은 인간 명제가 존재할 수 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명제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까뮈의 명제와 ‘나는 반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브레히트의 명제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의 정체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삼 년 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얘기만 들었을 때는 헛웃음으로 넘겼지만, 영혼을 끌어서라도 아파트와 주식에 매몰하는 ‘영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왠지 모르게 명치 끝이 심하게 저렸다. 그런데 부동산 관련 뉴스가 남한 사람들의 모든 대화를 잠식하는 오늘에 이르러서 나는 맨붕이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욕망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연적인 행위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정신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쾨테가 파우스트에서 예언한 ‘영혼팔이’ 곧 인간성의 타락 내지는 파멸을 보면서는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다. 뭐 그렇게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생 목사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하늘의 뜻을 전파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왔다고 자부하여 왔는데, 그러한 나의 존재성 자체가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흔히 영육이원론(영혼-육신)에 기초한 근대철학의 기원으로 얘기되지만, 데카르트가 본래 의도했던 것은 인간 사고의 자주성을 통해 신의 존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어떻게 말하면 철학적 명제라기보다는 신학적 명제였다. 

 

다른 모든 성인들도 그러했지만, 이천 년 전 예수는 ‘돈과 하느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이 가르침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에서부터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차라리 오늘의 교회는 ‘성공돈자본주의’에 맞는 ‘성경(成經)’을 따로 만드는 것이 옳겠다. 

 

젊음의 특성이 무엇일까? 젊은이를 나이로 구분하는 오늘의 방식은 참으로 잘못된 방식이다. 인간(人間)의 정의는 ‘언어를 구사하고, 사유와 성찰할 줄 알고, 그리고 사회(공동체)를 구성할 줄 아는’ 도덕성의 고등동물을 일컫는다. 

 

‘젊다’는 말은 인간으로서의 활동력이 가장 높은 시기를 말한다. 사람됨의 본성이 가장 높은 시기를 뜻한다. 사람됨은 자기됨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땅에 젊은이들이 넘치는 사회를 꿈꿔본다. ‘나는 반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꿈꿔본다.